호세아서 1장부터 3장까지는 바람난 아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했다면, 11장은 배역한 아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본문의 내용으로 3가지를 집중 살펴본다. 먼저 1절에 말하는 ‘내 아들’은 누구인가.
1. 사랑의 대상: 내 아들
1)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렀다’고 한다. 어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그 때를 말한다. 식민지 백성으로 어린 아이처럼 대항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얘기한다.
2) 예수 그리스도: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렀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이 어렸을 때에 헤롯의 폭정을 피해 애굽에 머물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로 올라 온 일이 있다. 마태는 이 사건을 ‘애굽에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는 호세아서를 인용했다. 즉, 이 때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3) 신약의 교회: 호세아는 이 아들이 ‘앗수르에서 돌아오는 일’이 있음을 예언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이 돌아 온 일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포로귀환은 남유다의 백성들이 바빌론에 잡혀갔던 일이지, 북이스라엘 얘기가 아니다. 그럼, 이 예언은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을 앞선 10절의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10절에 ‘여호와를 따르는 이들이 서쪽에서부터 온다’고 한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북동쪽이다. 그럼 서쪽은 어디를 말하는가. 그것은 소아시아, 구브로, 마케도니아,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이다. 이 지역은 정확히 신약의 사도 바울이 돌아다니며 전도한 지역이다. 그 때 예수를 믿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동쪽의 앗수르 지역을 포함한 사방의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 즉 신약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호세아가 예언한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의 아들은 예수를 믿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인도 방법
하나님은 ‘사람의 줄’로 우리를 이끄신다.(4절)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에 아주 미묘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마침’이라는 단어이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완전히 낯선 이스라엘 땅에 들어온다. 연명을 위아여 당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공짜로 제공이 되던 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주우러 우연히 한 밭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곳에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친족 보아스의 밭이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 우연히 들어갔던 바로 그 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등장한다. 그래서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후에 이 둘은 결혼을 한다.
이 때 쓰인 ‘마침(히.히네)’의 정확한 뜻은 ‘보라(look)'라는 뜻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는 감탄사이다. 이 ’마침‘은 성경 곳곳에 등장한다. 다윗이 우연히 형제들의 도시락을 갖다 주러 전장에 갔을 때도 ’마침‘ 블레셋 골리앗의 이스라엘을 모욕한다. 그 소리를 다윗이 듣고 골리앗을 물리치는 일이 발생한다.
신약에도 똑같은 단어가 있다. 그것은 ‘이두(헬)’이다. 히네와 동일한 뜻인 ‘마침’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지붕에서 기도 중에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은 유대인이 먹지 않는 짐승들을 먹으라는 주님의 지시였다. 3번이나 동일한 환상을 본 베드로는 이것이 무슨 뜻인가 고민한다.
그 때 ‘마침(헬.이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온다. 이들은 이방인으로 당시 유대인들이 더럽다고 여기던 자들이다. 때마침 도착한 이들을 통하여 베드로는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것이 복음이 유대 땅을 벗어나는 일에 큰 기점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연을 가장한 ‘마침’으로 일을 하신다. 그 ‘마침’은 언제나 사람을 동반하여 하나님의 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람의 줄’이다.
3.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
가장 이상적인 세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의와 평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들여다보라. 옳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날이 서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계속적으로 지적하고 교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 사이에는 평화가 없다. 항상 긴장이 있고 날카로움이 있다.
의로우면 싸우게 되고, 그것을 피하려고 평화를 택하면 모든 것을 다 눈감아야 하기에 바른 정의가 설 수 없다. 즉, 정의와 평화는 서로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명제이다. 그런데 이 둘을 공존 가능하게 한 것이 있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4절에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직역은 ‘내가 허리를 굽혀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이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낮아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내려와서 인간의 수준으로 그들을 대했다는 ‘성육신’을 의미한다.
본래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려면 잘못된 것을 잘라내고 뽑아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날선 검들을 대신 감당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십자가 앞에 항복하도록 이끄신다. 그 모든 것을 책임지시겠다는 표현이 ‘그들 앞에 먹을 것을 주셨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전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내치지 않으신다.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 항복하여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며 그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것으로 평화로 인도하신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은 후에 받게 되는 가장 큰 복의 결과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 받은 가장 큰 보상은 내가 원하는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에 있지 않다. 내 실수와 실패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보상이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에 무게에 버거워하고 힘들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화 가운데 거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내 의지로 결단하고 결심하여 내 노력으로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거칠고 형편없어도 나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나를 조건이 아닌, 단지 자녀이기에 나의 아버지이기에 오늘도 변함없이 허리를 굽혀 우리를 먹이신다는 믿음이 오늘의 지친 하루를 이겨내는 힘이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호세아의 예언이 바울 시대에 정확히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떤 생각이 드는가.
3.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경험을 나누어 보라. 혹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4. 우연을 가장한 ‘히네(마침’을 경험한 일을 나누어 보라.
5. 실질적으로 내가 예수를 믿게 된 후에 받은 복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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