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브로에서 사역을 마친 선교팀은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로 이동을 한다. 이 과정 속에 선교팀 안에서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리더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바뀐 것과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다. 학자들은 마가가 돌아간 이유 중 하나가 바울이 풍토병에 걸린 것을 보고 두려워서 집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방문하기 전에 병에 걸린 것은 그가 갈라디아 지역에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갈4:13) 결코 만만하지 않은 이 여행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1. 내 인생 내 손에 있지 않다.
밤빌리아 버가는 상당히 큰 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팀은 버가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울이 풍토병에 걸려서 속히 기후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몰아가시는 방법이다.
사실 바울은 자기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 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성경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예수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예수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기에 전도를 시작하면 일사천리로 잘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라비아와 다소에서 약 13년 동안을 조용히 홀로 지내야 했다.
바나바가 찾아와 안디옥 교회를 같이 섬기자고 했을 때도 그 교회에 계속 거할 줄 알았다. 그런데 1년 만에 선교팀으로 파송된다. 버가부터는 팀의 리더가 되었다. 그런데 버가에 도착하자마자 풍토병에 걸려서 아무 것도 해 보지도 못하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이동을 해야했다.
그의 인생은 완벽한 실패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부르심을 기준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우리가 너무나 부러워할 정도로 하나님 나라에 조율된 인생이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면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이고, 이로 인해 또 다른 차원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2. 바울의 설교 내용
본문에 나온 바울의 설교를 보면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앞서 7장의 스데반의 설교와 비교하면 구성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을 두고 차분히 시간 계열로 설명하여 구원자가 예수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것이 이 두 사람이 한 설교의 공통점이다.
이것이 왜 놀라운가. 왜냐하면 스데반이 설교를 할 때에 바울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바울이 스데반의 설교에 전혀 감동과 깨우침이 없었다. 똑같은 설교인데 오히려 분개했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지금 바울이 하고 있다.
무슨 얘기인가. 바울이 지금 듣는 사람이 듣기 좋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양보가 없다. 바울은 진리에 대하여 조금도 물러날 수 없다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 설교는 성경을 전하는 자리이다. 설교가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 인간 승리와 도전의 이야기, 특별히 복 받는 이야기로 채워질 때에 기독교는 변질이 된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그들에게 전한 것이다. 그들의 감정적 반응 보다 바른 내용의 전달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나온 세 사람(베드로, 스데반, 바울)의 설교는 ‘역사적 기반’을 둔 설교이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분되는 기독교의 근본 원리이다. 하나님은 기독교를 어떤 개념적인 것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종교와 철학이 말하는 진리는 예외 없이 개념적이고 추상적이다. 범인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대부분 ‘이야기(story)’이다.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역사서, 예언서, 복음서, 사도행전 등 거의 모두가 이야기이다.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책들도 역사적 이야기 속에서 발생한 것들을 설명한 내용으로 채워있다.
물론, 바울이 쓴 몇몇 서신서에 어려운 개념이 등장을 하지만 이 역시 대부분 이야기다.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교훈을 얻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 그분의 세계관과 정신은 인간의 언어로 도저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일로써, 그 일을 보고 그가 어떤 분인지를 우리의 수준과 사고로 담아내기 위해서이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의 진리를 공부하면 아주 단순한 것으로 종결이 된다. 그것은 단 하나, ‘예수가 구원자이다’. 이것이 결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적인 진리로,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지식을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쉽게 이해하며 단순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모두가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설교가 그러했다. 바울은 이 설교를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셨음을 강조했다. 즉, 언약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실 것을 계속적으로 약속하셨고, 그것을 이루어내셨는데, 그 구원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38,39절) 그리고, 하박국의 예언을 통하여 이 땅에 구원자(예수님)가 와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을 예언한 내용을 확인시켜줬다.(40,41절)
이 설교를 들은 안디옥 회당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왜냐하면 이들은 구약의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의 완벽한 논리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구약에는 예수님이 탄생과 그가 행하시는 일에 대한 예언 300여개가 있다. 그 모든 것이 단 하나를 빼고 완벽히 이루어졌다. 그 하나는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예언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고 죽은 자는 구원이 있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한 가지를 내가 지금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하여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믿고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란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마가의 입장이었다면 타우루스의 산맥을 넘었을 것 같은가. 아닌 것 같은가. 그 이유는?
3. 내 인생이 바울과 같으면 나는 어떻게 반응을 했을 것 같은가. (되는 일이 없는 인생...)
4. 바울을 버티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5. 복음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설교는 어떤 것이 있는가.
6. 내가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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