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세속주의에 대한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얘기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도입한 예가 야곱이다. 야곱은 신자임에도 지극히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인 삶의 태도로 산 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의 인생에 개입하여 결국에는 그를 신앙의 아름다운 위인으로 만든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어떠한가. 그들은 호세아의 심판의 경고를 무시했다. 회개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앗수르로 끌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본국으로 귀향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그 어떤 역사적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에 어폐가 있다. 이런 이유로 그 때 포로로 끌려갔던 10지파의 사람들의 행방은 우리의 신앙을 이해하는 것에 중요한 명제가 된다.
● 10지파의 행방 : 먼저 북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10지파 전체가 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처음 남과 북이 갈라질 때는 10지파가 북 이스라엘로 간 것이 맞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북쪽으로 갔던 많은 지파의 사람들이 남 유다로 내려온 것을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북 왕국 여로보암 왕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도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남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남유다의 요시아 왕 때는 레위, 므낫세,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 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때는 이미 북이스라엘이 멸망한지 약 100년 정도 지난 때였다.(대하34:6.9) 아마도 앗스르가 북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에 피난 온 것으로 보인다.
신약에도 그 흔적이 있다. 예수님 탄생 당시의 선지자 안나도 아셀(눅2:36) 지파, 침례 요한은 레위 지파 사람이다. 또한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하는 말 중에도 이미 이스라엘에 12지파 사람들이 다 있음을 말한다.(행26:7) 그러니까 포로되었던 10지파가 흩어진 것이 아니다. 여러 이유로 본국으로 귀환한 것이다.
특별히 앗수르를 멸망시킨 제국은 바벨론 제국인데, 두 제국이 지역적으로 많이 겹쳐있다. 그러니까 바벨론에서 포로가 돌아 올 때에 여전히 아수르에 거하고 이었던 북이스라엘 포로들이 같이 왔다고 보면 전혀 무리가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12지파를 다 회복하신다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 맞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멋대로 살고 있는 야곱을 그냥 두지 않고 찾아와 회복시키셨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는가.
● 야곱의 회심 방법: 하나님은 야곱에게 찾아와서 강제적으로 무릎 꿇게 하셨다. 얍복강에 있는 그를 찾아와서 씨름하여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때려서 어긋나게 했다.(창32:25)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뭐든지 해도 받아주고, 토닥여 주는 것은 젖먹이 신앙때까지이다. 사리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훈육하여 교정하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르지 않은 신자의 태도를 용납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신자답게 살 때만이 신자는 행복할 수 있다. 만족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라도 바른 길을 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물리적인 힘을 가하자 그 때 비로소 항복을 한다. 그의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그가 20년 전에 집을 나설 때에 서원했던 바로 그 자리, 벧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의 회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 현재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모든 것에서 돌아서야 한다. 오늘 결심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방향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신자가 살 길이다.
● 하나님의 시제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결국에는 약속대로 본국으로 12지파 모두를 귀환시켰다. 그러나 이 사실이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결코 반갑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앗수르에 잡혀갔던 포로들은 다 죽었다. 못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큰 그림으로 보면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시고 이끄신 것은 맞다. 하지만 정작 그 시대에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은 다 못 돌아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 질 수 있다. 정작 나는 회복을 하지 못하고 죽고 내 다음 세대에 회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인하여 그렇게 기쁘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한 신앙의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앗수르에서 죽었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애굽을 벗어나서 광야에서 죽었을 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구원 받은 백성인 것과 동일하다. 광야의 죽음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를 광야에서 죽게 하셨다. 광야의 죽음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앗수르에서의 죽음도 그러하다.
그럼, 앗수르에서 죽은 자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첫째로, 신앙은 개인적이다. 민족으로 구원 받지 않는다. 개인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둘째는 천국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통치권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그 다스림에 따르는 자가 천국 백성이다. 그런 이유로 앗수르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는 자가 있고, 본국에서도 지옥의 삶을 사는 자가 있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단 하나 믿음이다. 믿음이 이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왜 일을 이렇게 하시는가라는 점이다. 믿는 자에게 고통도, 아픔도 없는 천국으로 이끄실 것이라면 왜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또한 왜 선악과를 통하여 죄를 짓게 만들어서 예수님에게 십자가 그 처절한 아픔을 겪게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없다. 하지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시제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왜냐하면 시간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시간에 갇혀있다. 그렇기에 호세아가 선포하는 심판(고통)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시제에 묶이지 않은 고통과 사랑은 공존하기에, 이것을 분리할 수 없기에, 나의 죄를 위하여 다시 또 십자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언젠가 그 분의 언어를 이해하는 그 날이 올 때에, 이 육체를 벗고 그 분을 대면하여 보는 그 날에 심판과 사랑을 동시에 선언한 그 하나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하나님이 나를 강제로 끌고 가고 있다는 느낌 혹은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3. 내가 확실하게 하나님께 맞아서 잘못된 신앙의 길을 교정한 경험이 있는가? 그 때 느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4. 내 기도가 내 자손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나누어 보라.
5. 내가 이해하는 시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시제가 없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 나누어 보라.(벧후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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