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175세에 별세한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시고, 집요하고 끈질기에 그의 삶을 간섭함으로 결국에는 참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열정과 인내를 살펴봤다.
그가 말년에 큰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된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 아니었다. 믿음 없는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정성을 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의 말년과 죽음은 어떠한지를 살펴본다.
1. 아브라함의 말년의 모습
원어에는 1절이 ‘와요세프’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더하였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단어를 포함하면 ‘아브라함이 아내를 취하는 일을 또 다시 저질렀다’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성경의 저자는 이 일을 ‘잘못된 일’이라고 단정을 하고 시작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를 취한 것을 통해 인간의 특성 3가지를 알 수 있다.
1)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금방 잊는다. 그는 100세 때에 이미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죽은 몸과 같았다.(히11:12) 그런데 하나님이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삭을 낳을 정도로 몸이 회복됐다. 그런데 그 은혜가 그의 마지막까지 가지를 않았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쉽게 망각한다.
2) 인간은 주신 은혜를 개인의 사욕을 위해서 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강건케 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자손을 주신다는 것을 잊고 그 건강을 개인의 사욕을 위해서 썼다. 후첩을 또 두었다. 이것은 서원한 사람들이 소원을 이룬 후에 다른 짓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3) 신자의 온전함은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생의 마지막까지 인도하셨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온전하지 않다. 물론, 젊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신앙의 진보가 있다. 하지만 죄와 상관없는 모습으로 이 땅을 떠난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도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눈을 감았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상당히 위로를 준다.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모든 신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만일 하나님의 택한 사람의 마지막은 누구나 다 온전해진다고 하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은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나의 거친 모습을 보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 역시 말년에도 실수하는 것을 보며 현재의 나의 모습이 부끄럽기는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걷는 신앙의 길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의 계속됨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를 이어서 지속된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유산으로 주었다. 반면에 다른 자녀들에게는 그곳을 떠나 동방에 정착할 자금(gift)만 준다.(5,6절)
이것은 그가 많은 자녀를 두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 받을 자녀는 이삭 한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는 이삭을 남기고 다른 자녀는 동방으로 보낸 것이다.(6절)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든다. 만일 이삭이 유일한 복의 상속자라면 다른 자녀들은 잘 안되고, 이삭만 잘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삭 뿐 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모든 자녀들이 다 잘 됐다. 특별히 이스마엘의 열 두명의 자녀들은 열두 방백이 되어 통치권을 갖고 번성해 갔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스마엘도 하나님께 복을 약속 받은 자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복을 주어 큰 민족과 나라를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다.(창17:20, 21:18) 그렇다면, 이삭과 이스마엘의 차이는 무엇인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후의 세계에 차이가 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이 땅의 복을 똑같이 받았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약속 받은 것은 이삭 뿐이다. 이삭 만이 언약의 백성이다. 이것이 큰 차이다. 이 둘 모두 이 땅을 살 때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동일한 복이라 느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언약의 자녀인 이삭에게만이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다. 이스마엘에게는 내세를 약속하는 자손이 나오지 않는다.
가나안 땅은 오직 이삭에게만 주어지듯이 죽음 이후에 맞이할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이삭의 후손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들만이 가게 된다. 이 땅의 부, 건강 그리고 명예를 원하는가. 이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되면 굳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된다. 다른 종교를 믿어도 그 복을 다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속의 자녀들만이 이르게 된다. 그것이 언약의 자녀들이 누리는 차원이 다른 복이다.
3. 만족한 인생
아브라함의 생애는 순탄하지 않았다. 변화무쌍하며 파란만장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은 꽤나 평범했다. 그는 많은 자녀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장지에는 이삭과 이스마엘 두 사람 뿐이었다. 아내가 묻혀있는 막벨라 굴에 그저 자기 몸 하나 누울 땅에 장사된다. 전혀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복을 약속 받은 사람의 마지막치고는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하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는 그의 죽은 모습을 이렇게 얘기한다. 그는 충만하며 만족했다고(8절). (역:‘나이가 높고 늙어서’의 직역이 ‘충만, 만족’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마지막 모습은 늘 기쁨이 충만하고, 만족을 누리는 삶이었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살아서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했다. 또한 사후에는 이제 하나님이 계신 그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기에 전혀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완성하신 복은 쉽게 잊고, 아직 못 이룬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느끼게 한다.
반면에 아브라함을 보라. 아브라함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한 모든 것이 결코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지만, 자신의 명의로 된 땅은 고작 자신이 묻힐 공간 밖에 없었다.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 받았지만, 죽기 전에 이삭을 통해서는 손자 에서와 야곱을 포함해서 겨우 3명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미완성의 약속이 그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께서 완벽히 채워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복음이 있는 자의 힘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시작된 그의 긴 신앙의 여정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고, 이끌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 그가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하나님이 항상 같이 있었고, 그와 모든 것을 함께 동행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믿음의 현장이다.
● 나눔 질문
1. 아브라함의 전 생애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왜 그것이 남는가.
2.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운가. 아니면 기대가 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내 자녀 대에까지 이어지기 바라는 복은 무엇인가. 왜 그 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4.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만족스러운가.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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