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첫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라고 얘기했다.(15:9)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발언 위에 상황적 해석이 더해진 야고보의 최종 결론이다.
● 야고보는 누구인가
이 회의의 총회장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예수를 믿지 않았었고, 가룟 유다가 죽은 후 부족한 사도 한명을 채울 때에도 후보에도 오르지 않았었다. 그것은 그 때는 주목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수석 제자였던 베드로가 이방인과 교제를 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적 성향이 강한 야고보를 초대 감독으로 세웠다. 그러니까 베드로 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 야고보이다. 그는 바울이 교회의 기둥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갈2:9)
그러나 야고보는 이방인을 향하여 좋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이전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자리를 피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이 유대인을 보낸 사람이 바로 야고보다.(갈2:12) 그랬던 그가 이 공의회에서 베드로, 바울 그리고 바나바가 하는 변론을 듣고 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이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 옛적에 선지자 아모스가 했던 그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씀을 통해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가 갖고 있던 고정 관념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막혀진 사고, 우리의 어깨 위에 놓인 무거운 짐을 깨부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것의 기준은 ‘내 유익, 내 상황, 내 편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공동체와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야고보는 말씀을 근거로 이방인에게 율법의 멍에를 지우게 하지 말 것과 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3가지 금지해야 할 사항을 제안한다.
● 야고보 사도의 제안
1) 우상의 더러운 것
이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에 이방 땅의 시장에 나온 고기는 모두 다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후에 나왔다. 그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사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에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전8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기독교인이지만 아직도 유대의 전통을 따르는 초신자들이 볼 때에 시험에 들까봐 그들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신자의 중요한 행동 지침은 내가 하는 일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나로 인하여 시험에 든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덕에 대한 차원의 이야기이지 율법의 족쇄로 다시 묶기 위함이 아니다.
2) 음행
당시의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에는 제물을 가지고 온 남자들과 신전 여사제들이 서로 온갖 음란한 일들을 행했다. 이 여사제들은 창녀인데 약 1천 명 정도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음행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다. 야고보는 이런 환경 속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방 문화에 속하여 행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전에 이방신을 섬기던 문화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아이러니하게 구약의 율법에서는 벗어났는데 과거의 신에서는 못 벗어난 것이다. 참된 신자라면 이 일을 벗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3) 목 매달은 짐승의 고기와 피
유대인들은 피는 생명으로 간주하기에 피를 먹지 않는다. 그런데 고기를 도축할 때에 목을 자르지 않고 매달아서 죽인 짐승은 피가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고기를 먹을 때에 자연스럽게 피를 먹게 된다.
그런데 이방 지역에도 회당이 있어서 유대교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개종해서 예수를 믿을 때에 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 역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하는 권고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우리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에 속하지 않음을 가르쳐야 한다.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확실히 알게 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복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역시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덕에 관한 부분이다.
야고보의 결정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구원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명심해야 할 ‘믿음과 율법’과의 관계이다.
그렇기에 신자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늘 우리의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덕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자유인이다. 하지만 그 자유가 방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많은 경우 설교를 듣고 좋았다고 하면, 대부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설교자가 동일한 얘기를 할 때이다. 내 생각이 확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원하고 바라는 내용, 듣고 싶은 내용을 설교하면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말씀에 은혜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니까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고집하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산산이 부서진 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현장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삶이요 방향이다. 그것이 마땅히 우리 신자가 걸어가야 할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는 제사 음식을 먹을 때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3. 내가 갖고 있는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태도들이 있는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4. 내 안의 음란을 이길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있는가.
5. 말씀 안에 산산이 부서진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보라. 그 후의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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