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로마 식민지의 영향 아래 있었던 헬라 문화권 사람들의 다수가 유대인들을 아주 싫어하고 그들을 경멸했다. 또한 클라우디스 황제의 반유대 정책에 의해서 로마 식민지 영역 안에 있는 유대인들이 추방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에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귀신들린 여종을 만난다.
1. 귀신들린 여종과의 만남
성경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런데 한국말 성경에 번역된 ‘귀신’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한 단어가 아니다. ‘악한 영향을 주는 영’이라는 뜻을 담은 단어와 구절들이 모두 ‘귀신’으로 번역됐다.
같은 마태복음에서도 ‘귀신을 쫓아내며’(7:22)에 쓰인 단어는 ‘다이몬’이고 ‘더러운 귀신’이라고 쓰인 곳에서는 그냥 단순히 영(spirit)을 의미하는 ‘프뉴마’이다.(12:43). 프뉴마(영) 앞에 ‘더러운’이라는 단어로 인하여 ‘귀신(더러운 영)’으로 쓰인 것이다. ‘프뉴마’ 앞에 ‘거룩한’이 따라오면 거룩한 영인 ‘성령’이다.
이런 구분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귀신’이라는 단어의 한국말의 어감과 문화는 성경이 말하는 귀신과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말의 의미는 ‘죽은 사람의 혼령’을 떠올린다. 원한이 있어서 구천을 떠도는 영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이 죽으면 구천을 떠도는 일은 없다. 죽는 즉시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영매들에게 나타나는 죽은 사람의 혼은 그 사람으로 분장한 더러운 영이다.(삼상28장)
본문의 귀신들린 여종도,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인데, 여기서 ‘더러운’이라는 단어가 “피똔(python)"으로 아폴로 신전을 경호하던 ‘비단뱀’이다. 나중에 복화술을 쓰는 점치는 악령이다. 그렇기에 헬라어를 아는 사람이 이 구절을 읽으면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정체모를 영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악령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진지 오랜 세월이 되어도 성장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성경을 배우지 않고 본인이 가진 패러다임으로 읽기에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바른 뜻을 알지 못한다. 나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기에 자라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간단하게 악한 영의 명칭에 대하여 정리를 해 본다. 악한 영들에게도 계급이 있다. 그 대장이 개역개정의 ‘마귀’이다. 다른 한국말 번역에는 ‘악마’로 쓰이기도 했다. 영어의 devil이 ‘마귀’이다. 이 마귀의 졸개가 ‘귀신’이다.(마25:41) 이 마귀의 또 다른 이름이 사탄이다. 마귀 = 악마 = 사탄 = devil.
성경에서 마귀를 가르키고 있는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뱀(고후11:3), 바알세불(마10:25), 이 세상 임금(요12:31), 공중 권세 잡은 자(엡2:2), 악한 자(마13:19), 이 세상 신(고후4:4)이다.
그럼, 사탄의 이름은 무엇인가? 많은 경우에 ‘루시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루시퍼는 사탄의 이름이 아니다. 이 유래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라는 구절에서 ‘계명성’의 라틴어가 ‘루시퍼’이다.(사14:12) 전혀 누군가의 이름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루시퍼라고 번역한 곳도 유일하게 KJV 밖에는 없다. 다른 영어 번역본들은 모두 morning star, day star, shining star라고 번역했다.
사실 이 계명성은 ‘바빌론 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몰락할 것을 예언한 구절이다. 이 루시퍼의 또 다른 번역은 ‘샛별’이다. 벧후1:19절의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까지의 ‘샛별’이 바로 라틴어로 ‘루시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샛별은 예수님을 말하는데, 샛별(루시퍼)이 사탄이면 예수님이 사탄이 되는 이상한 해석이 나온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을 배워야 한다. 알아야 믿을 수 있고, 배워야 바로 믿을 수 있다.
2. 사탄 마귀의 전략
사탄의 별명 중에 ‘거짓의 아비’와 ‘광명의 천사’가 있다. 그렇기에 사탄의 거짓말은 분간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아주 살짝 살짝 바꾸기 때문이다. 이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에게 한 말도 마찬가지다. 바울을 향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얘기한다.(17절)
틀린 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헬라어로 보면 ‘구원의 길’ 앞에 정관사가 빠졌다. 즉, 유일한 길이 아니라 여러 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광명의 천사처럼 바울을 돕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곤궁에 빠지게 한다.
바울을 고소한 여종의 주인들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으로 성을 요란케 하고 로마사람들이 받지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신들이 불리한 얘기는 몽땅 뺐다. 자신들의 수입이 없어져서 그렇다는 말은 안 한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말을 빼거나, 더하거나, 살짝 다르게 말한다. 이런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분열을 만들고, 당파를 만들며, 그리스도의 거룩한 공동체를 깨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이 일로 바울과 실라는 태장을 많이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감옥에 갇힌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3. 감옥 안에서의 바울과 실라
이 두 사람은 강력범죄자, 사형수가 갇히는 ‘지하 감옥’에 갇히고 차꼬에 묶였다.(24절) 그런데 이들이 한밤중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송한다. 무슨 말인가. 이 말은 곧, 그들의 몸은 차꼬에 묶였으나 영혼은 묶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육신이 아니라 복음에 묶여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형태와 모습은 내가 어디에 묶여 있느냐에 따라서 그로 인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바울과 실라가 찬양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몸은 묶여 있으나, 영혼은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이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가 내게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수준의 앎은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 삶 속에 일어나는 작은 경험들을 통해서 내가 배운 진리가 확인이 되면 족한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작은 것들이 쌓이면 그것이 내 신앙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런 무지막지한 상황 속에서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은 다메섹 도상의 큰 경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바울의 바울됨은 그냥 말씀에 순종하며 걸을 때에 만났던 그 작은 그리스도의 경험 때문이다. 내 생각과 달라도 말씀이 가르치는 방향으로 걸어갔더니, 그게 쌓여서 감옥 안에서의 찬양이라는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요. 자랑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알고 있는 귀신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귀신이 내게 주는 영향이 있다면 무엇인가
3. 혹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정신 병자와 어떻게 다른가.
4. 시간이 지나고 나니 사탄의 꾐이라고 알게 된 일이 있다면 나누어 보라
5. 이번 주에 겪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작은 경험들을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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