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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Soo Yong Lee

04.04.2021. 부활, 그 믿을 만한 증거. 행17:31절

고난 없는 부활은 무가치하고, 이 고난을 통과한 부활을 통하여 신앙의 깊이가 더해진다. 이 명제가 우리에게 공감이 되고, 동의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의 경험을 통하여 증명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이 바로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그러한 고난을 의미하는 것인지 살펴본다.

1. 고난의 의미

먼저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내가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이 마땅한가. 그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얘기이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우리에게 주신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 이 과정의 반복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은 깊어진다.

그러나 사도들이 말하는 ‘고난을 통과한 부활’은 우리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고난 주간이 오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라는 슬로건 아래 금식, 금욕, 절제 등을 많이 행한다. 이것을 통하여 나도 주님의 고난을 느껴 보고, 그가 진 십자가의 고통의 짐을 나누어지고 싶은 마음으로 ‘고난에 동참’한다.

이렇게 행하는 이유는, 사도들의 편지 중에 이런 문장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먼저,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한다고 했다. (빌3:10,11) 이 구절을 근거로 ‘고난에 동참’하는 운동이 일반화 되었다.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참여’의 뜻은 ‘나누어진다’라는 뜻이 아니다. 원어는 ‘코이노니아’ 즉, ‘교제, 사귐’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한 ‘고난의 참여’는 ‘고통을 나누어 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을 묵상함으로 그와 소통하고, 그의 고난의 의미를 통하여 ‘그와 깊은 교제를 하는 것이 부활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베드로 사도의 경우를 살펴보자.

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라고 했다.(벧전 4:13) 여기에 쓰인 ‘참여’는 ‘코이노네오’라는 말로 ‘공유하다. 교제를 나누다. 함께 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로는 share와 participate이다.

여기서의 ‘공유’도 ‘분할’의 의미가 아니다. ‘쪼개거나, 훼손하지 않고 여럿이 참여하여 함께 한다’는 뜻이다. 마치 인터넷 클라우드 공간에 저장해 놓고 lock을 건 후에, 공유 링크로 다른 이들이 함께 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 갖는 명확한 성경적 의미, 대속의 의미를 알리고, 거기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나눠질 수도 없고, 내가 맘대로 바꿀 수도 없다.

이 개념은 정말 중요하다. 이런 의미가 훼손된 채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권장하다 보니, 이 사순절 기간에는 모두가 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나누어지려고 하며, 내 죄의 무게를 내가 지려고 한다.


그건 완전히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이 고통을 당하기 위해 오셨고, 이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대속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 그리스도의 고난 참여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고난에 참여하라’는 권고가 있는 베드로전서 4장 12~16절을 근거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에 의한 고난. 둘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는 고난이다. 이 중에 이 두 번째가 중요하다.

고난주간에 당하는 고난은 나의 절제와 금욕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내어 이 기간에 그리스도를 전하고, 알리다가 받게 되는 치욕과 수치 그리고 핍박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자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 이 고난 주간에 내 삶에 나타날 때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가 더욱 의미 있게 될 것이다.

2. 부활

부활은 학문적, 지성적 입증이 가능하다. 먼저, ‘존재 증명’이 필요하다. 무언가 사실로 증명되려면 세 가지의 사실이 필요하다.


1) 객관적 사실: 관찰과 계량이 가능

2) 주관적 사실 : 관찰과 계량이 불가능(e.g: 사랑)

3) 상호 주관적 사실 : 주관적 사실을 말로 하고, 그 말에 부응하는 행동이 따라 올 때에 사실로 인정된다.

또한 ‘사실 증명’은 ‘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이 있다.

‘과학적 사실’은 반복적 관찰이 가능하고 계량해서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다르다. 단 한번 일어난 일이고, 반복할 수 없으며 계량화해서 수치로 나타낼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일어나서 ‘실증적 검증’을 통해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에 충족하면 역사적 사실로 입증이 된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아니’라는 가정을 통해서 ‘용납이 가능한가’ 라는 부분과 ‘일관성과 적절성’이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두 부분에 충분히 만족한다.

먼저 일관성과 적절성의 부분에는 사료들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의 수많은 기록과 증언이 사료로 존재한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풀리지 않는 숙제가 너무 많다.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러하다.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당시의 주류 지파인 바리새파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어느 날 소수이고 많은 사람들의 핍박의 대상이었던 기독교를 전하더니 결국에는 순교했다. 제자들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 요한을 제외한 모두가 다 숨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예수님이 돌아가신 바로 그 도시(예루살렘)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전원 다 부활을 선포했다. 그리고 열두 명 모두 다 순교했다.

이것은 무언가 그들에게 특별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특별한 사건이 뭔가.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과 다르다. 과학적 사실은 반복해서 관찰이 가능하고 계량화 할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역사적 사실은 기록된 내용이 있고, 그 내용이 일관성을 갖고, 적절성을 가지고 있으면 사실로 인정한다.

과학적 사실은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주관적 사실과 상호 주관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을 미루어 봐서 성경에 나온 부활과 그들의 증언은 신뢰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 증언대로 믿어줘야 그 후의 사람들의 변화와 행동의 양식을 이해하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부활은 실재이고 사실이다. 이제 단순하게, 스스로 세뇌해서 믿으려 하지 말고 학문적으로, 역사적으로 믿기 바란다. 그 사실을 믿는 자가 신자이고, 하나님의 기적을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고 행했던 ‘고난에 동참’은 어떤 것이었는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3. 나는 부활을 믿는가. 믿거나, 믿지 못한 다면 그 이유를 나누어 보라

4. 평소에 바울과 제자들의 순교를 대할 때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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