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낸 것이 원인이 되어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많은 매를 맞고 차꼬에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도하고 찬송을 했다. 오늘 본문은 찬송을 하는 중에 큰 지진이 나서 감옥 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차꼬가 다 풀어졌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시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재위 기간 중에 그 근처에서 지진이 많이 발생했다. 그레데, 서머나, 밀레도, 키오스 그리고 사모스 등지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빌립보 역시 이 때로부터 천년이 지난 후 결국에는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그렇기에 지진으로 옥문이 열렸다는 것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지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감옥 문을 열 수 있다. 앞서 베드로의 경우에는 지진이 아닌 천사가 문을 열었었고, 간수들도 눈치 채지 못했었다(행12장) 그렇다면 이번에는 왜 지진으로 옥문을 열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당시의 로마법 때문이다. 당시의 로마법에는 죄수가 도망가면 그 죄수를 지키던 간수가 대신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27절)
그런데 간수가 죽지 않을 수 있는 예외의 경우가 있다. 그것은 탈옥의 원인이 초자연적인 현상일 경우에는 간수가 책임을 면할 수 있다.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바울과 실라가 이 감옥에 들어올 때에 이미 이 간수의 구원을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만일 바울과 실라를 제외한 다른 죄수들이 모두 탈옥을 하더라도, 이 간수가 처형을 받지 않고 복음을 듣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옥문을 지진으로 여셨다. 그것은 바로 섬세한 하나님의 계획이요. 배려였다.
자, 이제 옥문이 열렸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았던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한다. 그것을 바울이 소리 질러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마라. 우리가 다 여기있노라”(28절)라며 자결을 막는다. 이 한 구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구원의 원리가 잘 드러나 있다.
원어에는 이 구절에 두 부분이 아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하지마라. 다 있다”라는 부분이다. 하지마라는 ‘메덴 프락세스’이다. 이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파스 갈 에이미’ 즉, ‘몽땅 다 있기 때문에’이다. 하나님이 다 준비하셨기에 아무 것도 하지 마라는 말이다.
그렇다. 구원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룰 수 없다. 이 지진도 그렇다. 이 지진이라는 기적은 바울과 실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들은 옥문이 열려도 안 나간다. 그렇기에 오로지 간수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몽땅 다 준비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바울이 간수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 된다. “아무 것도 네가 할 필요가 없다. 너를 상하게 하지 마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몽땅 다 너를 위해서 준비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설득이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초대하는 자리가 구원이다. 이 사실을 믿으면 우리의 신앙은 견고한 반석 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 간수의 반응
이 바울의 말에 간수는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절)고 대답한다. 이 말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하여 함축적 모든 표현과 내용이 잘 담겨져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본문의 배경에 대한 상황 설명 없이 이 구절 하나만 인용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복음의 바른 진리가 온전히 전달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 이 구절은 내가 처한 많은 문제를 ‘주 예수를 믿으면 해결이 된다’는 것으로 전해진다. 맞는 말이다. 전혀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믿는 것이 잘못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실수는 이것이 예수를 믿는 유일한 이유인 듯이 인식이 되어 전파가 되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을 조명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볼 수 있다. 그것은 현실적인 상황으로 보면 간수의 이 질문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는 바울은 얽매여 있는 자이고, 풀려나 있는 것은 간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유를 누리고 있는 간수가, 매여 있는 바울에게 구원, 즉 자유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이들의 질문과 대답이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 해결이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간수가 놀란 것은 초자연적인 지진으로 인하여 옥문이 열렸다는 것에 있지 않다. 옥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가 안 나갔다는 것에 있다. 간수 자신은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도 한 번도 누리지 못한 여유로움과 당당함 그리고 위엄(dignity)이 그들에게 있기에 놀란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묻는 질문은 어떻게 해야 내가 편안한 삶, 재정적 여유와 명예와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당신처럼 최악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으면 누리는 복이요. 구원이다. 이것은 내 삶 속에 여전히 놓여 있는 많은 문제 속에서 그것과 상관없이 누리를 수 있는 최상의 복이요. 바꿀 수 없는 권세와 능력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다. 가치가 다르고, 의미가 다르고, 삶의 목표와 방향이 달라는 것. 그것을 통해서 만이 누릴 수 있는 인생의 복.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된 본질적인 복이요. 구원이다.
복음은 분명 우리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자는 이 본질과 핵심 가치 아래, 이것을 근본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 신자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미 첫 단추부터 본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죽어야만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신자가 경험한 모든 것을 복음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곳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바울과 실라가 옥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때문이라 생각하는가.
3. 내가 알고 있는 구원을 불신자에게 설명해 보라. (연습차원으로 각자가 해 보세요)
4. 내게 처한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면 나는 어떻게 달라질 것 같은가.
5. 만일 전혀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달라질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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