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신자들이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혹은 무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 있다. 그것은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런 것이다. 내가 결정한 후에 일이 잘 풀리는가, 맘에 갈등과 고민이 있던 마음에 평화가 오는가, 이 일을 행하는 것의 동기가 순수한가 등이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고린도에서 사역하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해 본다.
● 고린도 도시
고린도는 아가야의 행정수도이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좁고 잘록한 땅의 서쪽 끝부분에 위치했다. 남북으로는 육상 교통, 동서로는 해상 교통의 요지이다. 이러한 이유로 무역이 활발한 상업 도시로 성장했다. 60 만명이나 되는 인구와 뱃사람이 있고 무역이 활발하여 부가 축적된 곳에는 반드시 따라오는 결과들이 있다. 그것은 유흥, 방탕, 음욕이다.
이곳에는 각종 신전이 많았으며 특별히 아프로디테(비너스) 신전에는 천명에 달하는 여사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합법적으로 매음하는 매춘부들이었다. 성적으로 아주 난잡했기에 성적으로 난잡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고린도에 연관된 것들이 많았다. (e.g: 고린도 아가씨=매춘부, 고린도 남자=포주 etc...)
바울은 문화와 철학의 도시 아덴 보다 인구나 문화나 종교적으로 한층 더 발전된 도시인 고린도에 왔다. 그렇다면 그는 이곳까지 오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에 차서 왔을까 아니면 반신반의하면서 왔을까...
그의 행로를 한번 복기해 보자.
바울은 본래 마게도냐 지역을 방문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1차전도 여행 때 방문했던 곳을 돌아보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계획과 달리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고 뒤도 안 돌아 보고 마게도냐로 왔다. 그래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을 지났다. 보라. 이 도시들 중에 한 도시라도, 만족스럽게 복음이 전해진 곳이 있었는가. 없다. 매질, 투옥 당함, 쫓김, 도망으로 그의 여행은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아덴에서는 손에 꼽는 몇 사람만 예수를 믿었고, 교회도 못 세웠다. 그리고 고린도까지는 혼자 50마일을 걸어서 왔다. 그의 여행은 갈수록 사람이 줄고 환영하는 사람은 없다. 이 상황에 놓인 바울이 과연 기쁨이 있으며 이 길이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며 걸었을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때의 상황을 바울은 ‘내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고백했다.(고전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길을 걸으며 계속 사역을 이어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사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있는 곳에는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보라. 빌립보에서는 루디아를 만났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을 만나고, 베뢰아에서는 믿음의 형제들이 아덴까지 동행한다. 그리고 아덴에서는 아가야의 첫 열매인 스데바나를 만나 가족에게 침례를 주었다(고전16:15)
특별히 고린도에서는 드디어 사도 바울의 사역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기둥 같은 사람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난다. 이들은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롬16:4)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일을 아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의 화려함이나, 평강과 안위에 대한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붙여 주시는가. 함께 할 사람과의 교제를 통하여 주의 나라에 힘이 더하여 지는가를 확인하면 알 수 있다.
바울은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것을 눈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그 큰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인 눈으로 확인하기에 계속해서 기쁨으로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뜻 안에는 항상 하나님의 예정, 그의 준비하심이 있다. 그렇다면 이 예정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가.
1) 실패 : 바울은 고린도에 올 때에 패잔병의 모습으로 왔다. 그 때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어땠는가. 이들은 본토 유대인들이 아니다. 디아스포라로 헬라파 유대인이다. 아굴라는 본도에서 태어나서 로마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었다. 그러나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에 의해서 떠밀려서 고린도에 오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인생은 처참하고 비참한 완벽한 실패이다.
2) 우연을 가장한 필연 : 패잔병 바울이 추방당한 자 아굴라를 만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만나 보니 텐트 메이커로 직업이 같다. 천막 기술이 일반화 되어 있는 다소 출신 바울이 천막 기술자인 아굴라가 고향도 아닌 고린도에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다. 신자에게는 결코 우연이 없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그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인도한다. 바울은 실패한 도시들 속에서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들을 만난다. 정말 적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통하여 일을 하셨다. 결국에는 실패자, 추방 당한 자 같은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고 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난다. 이 부부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떠날 때에 사역에 동행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사람을 만나 전도하여 데려다가 말씀을 가르쳐 신자를 만든다. 그가 바로 ‘아볼로’다. 이 아볼로는 후에 바울이 자신은 복음을 심는자, 아볼로는 물 주는 사람으로 표현할 정도로 고린도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큰 기둥으로 성장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요, 준비하심이요, 우리 인생에 대한 이끄심이다. 믿음은 멀리서 보고 환영하는 것이다. 당장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더라도 쓰러지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이끄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자. 그 때 그곳에서 큰 팔을 벌려 우리를 안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 것 같은가. 최선의 상황과 최악의 상황을 말해 보라.
3. 하는 일 마다 잘 안된 적이 있는가. 그 때 내가 갖었던 생각은 무엇인가
4.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우연은 어떤 것이었는가.
5. 왜 하나님은 실패자를 쓰시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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