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주제는 ‘하나 됨’이다. 1장에서 3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내용들, 즉 성도의 정체성을 신학적이고 교리적으로 풀어놨다. 그리고 이 4장부터 6장까지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부분, 성도의 삶을 말한다.
3장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말한 적도 없고, 우리를 교회 삼아달라고 한 적도, 주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달라고 간구한 적도 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플랜하시고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신 일이다.
그 뒤에 바울은 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너희가 완벽히 이해했다면, 이 모든 것이 성도의 삶에 실재가 되고, 손에 쥐어 누리라는 의미로 서신의 후반을 채우고 있다. 신자란 3장에만 머물고 있으면 안 된다. 4장, 5장, 6장 계속적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삶이란 무엇인가.
● 하나 됨
교회가 추구하고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 됨’이다. 아무리 신자 개개인이 훌륭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임이 인지가 되지 않은 상태의 교회는 반드시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은 이 짧은 본문에서 통일이라는 말을 포함하여 ‘하나’라는 의미의 단어를 10번이나 언급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하나 됨’을 이야기 할 때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쓴다. 그것은 ‘흩어진 것을 하나가 되게 노력하자’고 하지 않는다. 성령을 통하여 이미 하나인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한다.(3절) 즉, 성령의 하나 됨은 복음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하나인 것을 방해하는 무언가로부터 교회를 지켜 나가는 것이 신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탄생 이래 끊임없이 교회를 분열하고, 분리하는 세력과 싸움을 했다. 초대 교회 때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그리고 영지주의와 싸웠다. 이때로부터 시작된 교회를 해하는 세력들은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교회를 괴롭히고, 어지럽히며 ‘하나 됨’을 방해한다.
이들의 방법은 항상 동일하다. 절대로 교회 밖에서 공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밖에서 공격하면 교회는 싸울 대상이 분명하기에 오히려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신자들의 환심을 산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고, 흩어 놓고, 편을 만든다.
이 방법은 2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똑같다. 그런데 사탄은 이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길이 교회를 분열시키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신자 모두가 교회가 무너질 때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황 안에 있으면 그 속에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동일한 일이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엄한 목소리로 경고한다. 누군가 마음을 흩어 놓고, 갈라놓고,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기억하라고 한다. 그리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한 것을 의식하고 내가 노력해서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야 한다고 명령한다.(3절) 그럼,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하나로 지킬 수 있는가.
● 용납
그것은 서로를 향한 용납이다. 교회가 문제가 생길 경우는 대부분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이다. 신앙의 색깔, 섬기는 방법, 사랑의 표현 방법, 관점의 차이 등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에, 참아내지 못할 때에 그것 교회의 분열이 되고 결국에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성경은 교회는 하나 됨,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이 통일의 의미가 획일성(uniformity)을 의미한다면 바울이 하나의 내용으로 몰고 가야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gift,은사)을 다 다르게 줬다고 얘기한다.(11,12절)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방법으로 교회를 획일적(uniformity)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가진 다양한(variety)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통일성(unity)를 띄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통일성이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똑같은 모양과 크기를 가진 아름답고 영롱한 ‘진주 목걸이’가 아니다. 삐뚤고 뾰족하고 날카롭고 제 각각이라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조개껍질 목걸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완벽하게 다른 우리를 한 소망 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묶으셨다. 그 부르심이 있는 곳이 교회이다.(4절) 이 개념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신다. 얼마나 한 몸으로 잘 묶여있는가로 교회의 아름다움을 말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다양한 사람들을 굳이 하나로 묶으셔서 교회로 부르셨는가.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교회가 성도를 훈련하기에 너무나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곳이다.(12절) 이 온전함은 부러진 뼈를 맞춘다는 뜻이다. 못쓰게 된 것을 버리지 않고, 갈아끼우지 않고, 제자리에 맞도록 회복시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모자란 성도들을 버리지 않는다. 새 것으로 교체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들을 품고, 만지고, 보정해서 그 사람을 쓰신다. 그것이 교회이다.
신앙이란, 결국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인내이다. 그 과정 속에서 나의 인간적인 시각으로 구별하거나,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잘난 사람은 없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구원 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의 대상이기에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교회는, 사랑 받을 만한 자격 없는 자들이 모였기에 서로를 향한 위로로, 애틋함으로 지켜내는 곳이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유익임을 기억하자. 이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그리스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곳에 이르는 교회가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삶이란 무엇인가
3.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 방법을 통하여 얻는 것은 무엇인가
4.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 모습을 이루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5. 교회를 통해서 내가 받은 상처는 무엇인가. 이를 통하여 내가 배운 점,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