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에게 주는 권고
바울은 아내들을 향하여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22절) 반면에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고 한다.(25절) 이로 인하여 많은 아내들이 이 ‘복종하라’는 말을 불편해한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을 비하했던 그 시대의 유물이기에 오늘 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부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부부에게 주는 권고를 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시작한다. 그것은 부부는 ‘서로 복종해야한다’는 것이다.(21절) 아내만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 역시 아내에게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후에 각자에게 권고를 시작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하면 아내에게 복종을 상기하고 남편에게는 복종 외에 ‘사랑’을 추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을 물건 취급했던 당시의 문화 배경으로 보면 오히려 바울은 상당히 파격적인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복종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왜냐하면, 6장에 이어지는 부모와 자녀,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 권고할 때는 ‘순종(휘파쿠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헬라어로 순종은 ‘위로부터 듣다’라는 뜻으로 상하관계가 명확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본토를 떠날 때에 순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히11:8)
반면에 ‘복종(휫포탓소)’은 ‘위에서 정해 주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권세 아래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귀신들이 항복한다’(눅10:17)라고 말했을 때에 항복이 바로 이 단어이다. 신자와 귀신은 누가 높은지 애매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위에서 신자가 위라고 지위를 정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능력과도 상관이 없다. 복종의 지위는 능력으로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위에서 정해주는 것으로 간다.
이런 이유로 부부 관계를 순종이라하지 않고, 복종이라 했다. 왜냐하면 부부는 둘이 대등한 관계이다. 그래서 지위를 매기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가정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누군가 명확히 질서의 지위를 잡아 줘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 둘 다 서로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그것을 한번 더 아내에게 복종을 얹음으로 남편과 아내의 ‘질서 상의 지위’를 정리한 것이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관계와 같다. 이 세분은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 동일하다. 본질상 차이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 아들 그리고 그가 보내신 영으로 질서상의 위격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는 능력적인 측면으로 질서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아내가 남편 보다 월등히 능력이 있는 가정도 있다. 하지만 이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남편을 가정의 질서 상 ‘가정의 대표’로 위격을 부여하셨다. 이것은 문화가 생기기 이전의 창조 때에 정해진 질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두 개로 요약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마22:37~39) 즉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실제적인 표현은 나 아닌 누군가를 가슴에 품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 아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임을 꼭 기억하시고 남편을 세우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바란다.
● 남편에게 주는 권고
바울은 남편들을 향하여 아내에게 복종하는 것 외에 ‘아내 사랑’을 추가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사전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사전적 의미의 사랑은 ‘아끼고, 귀중히 여기고,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혹은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마음이 기준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언제나 순식간에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성경은 아내 사랑을 이런 감정적인 방법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자기를 완전히 내어 놓아 죽음에 이르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쁘고 즐겁게 지지 않으셨다. 두렵고, 떨리고, 무서워하셨다. 지고 싶지 않았다. 피하고 싶었다. 이것이 팩트(fact)다. 그러나 결국에는 갈보리 산에 올라 그 두려운 십자가를 감당하셨다. 이게 사랑이다.
기독교 사랑은 하고 싶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우러나는 것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에 하는 것이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 사랑이다.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이다. 그 생각, 그 마음, 그 정신으로 아내를 품어야 한다.
성경은 부부는 하나가 되는 것(31절)이라고 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28절)이라 한다. 이것이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결혼은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나를 보게 만든다. 결혼은 나의 바닥을 보게 만들고, 나의 인간성의 한계를 보게 한다. 내가 가장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도구가 바로 결혼이다.
결혼 전에는 나는 내가 정말 대단하고 근사한 사람인 줄 안다. 나는 모든 사람과 잘 지냈었고, 모든 사람에게 배려 있는 사람이었으며, 모든 이들로부터 사람 너무 좋다는 호인으로 살았다. 그런데 결혼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완벽히 무너뜨린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거기서 끝내면 안 된다. 내가 죄인이구나를 깨달았다면, 내 시선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결혼의 또 다른 순기능이다.
바울은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충만해지기 때문이다.(엡1:23)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상대가 없으면 결코 충만해지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의 만족을 다른 곳이 아닌 배우자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 때 성경에서 약속한 충만한 삶을 맛보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배우자에게 복종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복종할 수 있을 것 같은가
3. 내 배우자가 나를 대하는 방법에서 내가 가장 바라는 부분은 무엇인가
4. 내 배우자로부터 참 사랑을 느낄 때는 언제였는가. 왜 그렇게 느꼈는가.
5. 결혼 생활을 통해서 내가 죄인이구나를 느낀 적이 있다면 언제인가. 나눌 수 있는 수준에서 나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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