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장에는 부정, 부패 그리고 비리가 가득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등장을 한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의 높은 사람들 즉, 산헤드린 의원들이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은 한명이었고 종신제였다. 대제사장의 사후에는 그의 장남이 그의 직을 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대제사장들’로 복수의 사람들이 등장을 한다.
그 이유는, 로마의 식민 통치 이후에, 대제사장은 로마 혹은 유대의 권력자가 임명했다. 이에 따라 그들의 입맛에 맞게 교체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임과 후임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 대제사장들은 하나님 편에 옳으냐를 생각하기보다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어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유지하려 하였다. 종교계의 타락이다.
한편, 총독 벨릭스 때에 감옥에 수감되었던 바울은 미결수로 2년을 갇혀 있었다. 그 사이에 벨릭스는 해고가 되고 그 후임으로 베스도가 총독에 올랐다. 그는 정치적인 감각, 행정력, 지도력이 뛰어났으며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총독으로 가이사랴에 부임한 지 삼일 만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주요 인사들과 상견례를 했다.
그 때 그 유대 인사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암살단을 구성하여 이동 중에 바울을 살해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이 죽어야 유대교가 무너지지 않고, 유대교가 무너지지 않아야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베스도를 따라서 가이사랴에 와서 바울을 처리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바울이 로마 네로 황제에게 직접 상소하는 바람에 수포도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유대인의 분봉왕 아그립바와 왕비 버니게가 총독을 알현하러 왔다. 총독 베스도는 아그립바의 비위를 맞추려고 일부로 그의 조언을 구하는 척하며 아그립바와 바울을 대면하는 청문회를 열었다. 이 때 이들의 만남의 자리를 통해 바울의 하나님 나라와 유대인들의 세상의 나라는 극명한 대조를 볼 수 있다.
성경은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이 청문회에 ‘크게 위엄을 갖추고’왔다고 말한다.(22절) 원어의 의미는 ‘판타지아’로 과시, 허영, 허식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는 가장 위엄 있는 자주빛 왕복과 금 모양의 왕관을 쓰고 나왔을 것이다. 버니게는 왕비에 맞는 화려한 옷을 입었을 것이고, 총독 역시 주홍색 예복으로 격을 갖추었을 것이다. 그곳에 함께한 다섯 명의 천부장 및 시중의 높은 사람들 역시 훈장과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등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끌려나온 바울은 어떠했을까.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바울의 모습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거친 누더기의 옷차림과 씻을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하여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머리나 수염도 가다듬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모든 것이 형편없고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거지와 같은 모습임을 쉽게 그릴 수 있다.
성경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가. 그것은 기독교의 힘은 그런 판타시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영광과 화려함이 기독교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자요, 사명을 받은 바울은 골방에 버려져있다. 반면에 세상의 상징인 로마는 점점 장성한다.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이 갇힌 2년 동안 그의 주변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한 일을 보라. 총독 벨릭스는 주기적으로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으나 그는 신자가 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후임 베스도가 보는 바울은, 자기가 믿는 종교에 따라 예수라는 자가 부활하는 것을 주장하는 그닥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느끼고 있다. 그는 바울을 그렇게 큰 영향력 있는 존재로 보지 않고 있다.(19절)
이 모습이 일반 신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결과와 일치하는가. 믿음이 좋으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을 조건으로 얻어지는 현실의 보상이 지금 바울에게서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뒷방의 노인네처럼 취급 받고 있는 버려진 처지가 되어 있다.
사실 이 모습은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자들의 현실과 크게 차이가 없다. 신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갖는 부와 명예와 권세는 없다.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모두 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마치 내가 믿음만 있으면, 이렇게 버티다 보면 세상의 권세와 부와 명예를 주실 것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요즘 표현의 희망 고문이다.
믿음과 세상의 복은 상관관계이기는 하지만, 인과관계는 아니다. 믿음이 원인이 되어 세상의 복이 결과로 주어지는 약속은 성경에 없다. 그렇다면 이 험한 현실을 사는 우리 신자들에게 주어진 숙제는 무엇인가. 이런 숨 막히는 정황 속에서 이 땅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누추한 모습으로 아그립바 왕 앞에 서 있는 바울의 일성을 통하여 신자의 바른 태도와 자세를 알 수 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 바울의 설교를 듣고 화가 난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몇 마디의 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 때 바울은 왕에게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26:29) 이것은 바울이 세상을 향한 진심이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가 그들 보다 못할지라도, 그들 앞에서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당당함, 넉넉함 그리고 호기. 이것이 복음을 가진 자게 취할 수 있는 삶의 자세요. 태도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의 방법으로 승리하지 않는다. 복음이 가진 승리는 그들의 승리와 다르다. 진정한 복음의 승리를 가슴에 안고 사는 자는 세상의 것에 구애 받지 않는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살 수 있다. 신자는 어렵고 힘든 세상 속에서 그저 생각과 마음 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의 태도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십자가 복음의 힘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바울과 같은 처지의 상황에 놓인다면 그 2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나에게 유익할 것 같은가.
3. 왜 하나님은 바울을 감옥에서 빨리 빼 주시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4. 내가 신자로써 불신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가.
5. 불신자들을 볼 때에 가장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6. 세상의 것에 구애 받지 않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가
7. 나는 도쿄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와 태극기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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