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가난하고, 억울하고, 애통했다. 그들은 이것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받는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메시야로 생각하는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복을 받은 자’라고 선언했다. 그것이 팔복이었다.
예수님의 행보 역시 율법에 반하는 행위가 많았다. 죄인들과 교제를 하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유대 땅에는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왔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이 말을 잘 알고 있던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이 땅에 온 이유를 명확히 밝히셨다. 그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셨다.(17절)
여기서 ‘완전하게 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가득 채우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율법의 부족한 부분을 예수님이 채우셔서 완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부분을 채우셨는가. 그것은 18절속에 답이 있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지만, 그래도 평생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 종종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말씀으로 인하여 율법과 은혜 즉, 율법의 기능과 예수님의 역할이 애매해졌다. 믿은 후에도 율법을 지켜야 되는 것인지, 안 지켜도 되는 지에 대한 논쟁이 항상 따라 다녔다.
이 단어는 원어(헬라어) 성경을 보면 분명하게 정리가 된다. 헬라어에는 이 구절에서 한국말 ‘~전에는’이라는 전치사가 없다. 이 단어가 아니라 ‘~까지(헬.헤오스)’라는 단어다. 즉, ‘천지가 없어지기까지’이다. 그런데, 이 ‘헤오스’라는 단어는 같은 구절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까지’이다.
이 18절을 한국말로 직역하면 이렇게 된다.
-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 - 율법이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 율법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조건을 달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와 ‘율법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이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율법이 없어지는 두 가지 경우를 볼 수 있다. 1)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2) 율법이 다 이루어지면 이다. 이 두 가지의 경우가 만족될 경우에 율법은 없어진다.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원어를 보면, 이 구절은 율법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없어지게 되는 경우도 중요하게 언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이미 율법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모든 율법은 완벽히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숨이 넘어가지 직전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시고 돌아가셨다.(요19:30)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이 없어지는 한 가지 조건은 완성이 되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이다. 그러면 이제 율법이 필요 없어진 것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기에 더 이상 율법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다른 하나가 충족이 안 됐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하는 부분과 완전히 폐기가 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어느 부분이 존재하고 어느 부분이 폐기되었는가.
그것은 율법의 형식은 없어졌다. 이제 더 이상 세밀한 항목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특별히 제사법의 경우는 제사장, 성전, 성막의 도구들은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메시야의 실체인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 폐기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인 율법의 정신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도덕법의 경우는 여전히 우리가 지켜야 할 덕목이다. 이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안 지켜도 구원은 받는다. 하지만 존중되고 지켜 나가야 할 율법의 정신이 바로 이 ‘도덕법’이다.
이 도덕법의 대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 사랑을 잘 지키면 모든 율법을 다 이루는 것이고, 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마22:37~39, 롬13:8~10) 그러니까 천지가 없어지기 전, 우리가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끝내 지키고 행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렇기에 이 ‘사랑’마저도 행하지 못해도 믿음 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렇기에 이것을 버려도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천국은 간다. 그러나 '작은 자'이다.(19절)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내가 구원 받은 감격이 있는 자라면 그 믿음에는 반드시 행동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만 있으면 막 살아도 된다. 그렇게 살아도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참 믿음의 신자는 절대로 막 살지 못한다. 반드시 내 안에서 자연히 이웃 사랑이 열매로 흘러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의가 어찌 율법을 다 외우고 지키는 바리새인 보다 날 수가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이다. 내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가는 것이다.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의인으로 칭함을 받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것이 우리가 소유한 종교 지도자들 보다 나은 의이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인 삶을 살지 않는다. 율법의 토씨 하나 하나를 지킬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내가 그 큰 십자가 사랑을 받은 자임을 분명히 깨달은 자는, 그 율법의 정신,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고 사랑함으로 완성되는 그 율법의 내용들이 우리 앞에 자연스럽게 알알이 열매로 맺어지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만일 내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이라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을 것 같은가. 아니면 믿지 않았을 것 같은가. 그 이유를 말해 보라
3. 내 안에 율법이 가시가 되고 찌르는 송곳 같이 느껴진 적이 있었는가. 왜 그러했는가.
4.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때에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5.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힘든 이유가 있다면 무엇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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