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은 헤롯 왕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베드로 역시 감옥에 갇히나 처형을 하루 앞둔 밤에 천사의 도움으로 탈옥을 하게 된다. 이 두 사도의 순교와 탈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1. 본문의 배경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왜 굳이 야고보를 죽여야 했는가. 그것은 그의 혈통과 관계가 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다. 에돔 족속의 후예인 이두매인이다. 반쪽 유대인인 것이다. 그 이유로 정통 유대인들은 헤롯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회가 있으면 반란으로 헤롯을 쫓아내려 하였다. 이를 두려워했던 헤롯은 유대인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무교절)에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급히 야고보를 처형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유대인들이 이것을 상당히 기뻐했다. 탄력을 받은 헤롯은 내친 김에 사도들의 수장인 베드로도 옥에 가두고 명절이 지난 후에 처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베드로가 탈옥을 하게 되고, 교인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가서 그들과 만남을 갖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다.
2. 야고보의 순교 vs. 베드로의 탈옥
이 두 가지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왜 하나님은 야고보의 죽음에는 침묵을 하시고, 베드로는 기적까지 동원해서 살려내시는가 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편애하시는 분이시라면 어떻게 내가 마음 놓고 그를 의지하겠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야고보일지 베드로일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먼저, 이런 상황이 오면 절대로 이것을 ‘인과율’로 접근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은 더 헌신하고, 더 희생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복을 주신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과율에 의한 보상의 차원이 아니라,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으로 혹은, 이것에 대한 단발적 보상과 격려의 차원으로 하신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이것을 공식으로 적용을 하면 신자의 일생에 많은 부분이 해석이 안 된다.
그럼, 이 두 사람의 전혀 다른 하나님의 처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정답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정답은 ‘모른다’이다. 이것을 결코 알 수가 없다. 이런 문제에 한 두 개를 정답으로 규정해 놓으면 전혀 해석이 안 되는 수 만가지의 케이스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사례와 목회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큰 틀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다.
1) 사명
하나님은 신자 모두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으로 신자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시며, 그 사명이 다한 후에 그를 불러 가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명은 모두에게 획일화되어 있지 않다. 우리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큰 사명, 작은 사명으로 구분이 되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개개인에게 주어진 각각의 사명의 분량과 내용은 다르다.
우리는 주인공과 엑스트라를 구분하듯이 큰 일, 작은 일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흐름에 우리가 사용된다면 그 또한 없어서는 안 될 큰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2) 제한적 사고의 틀
우리가 어떤 당면한 일을 두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굉장히 구분하기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 질서라는 제한된 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는 전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주어진 틀 안에서 사고를 하고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리학자 까를로 로벨리의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보면 시간에 관한 통상적 개념을 모조리 깨 버린다. 그는 그의 책에서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흐르는 것도 아니고 시간은 우리의 지각 오류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얘기한다.
이 물리학자의 말이 맞는가 틀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것을 두고 과학적 접근을 해도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또 다른 사고가 생겨나는데 하물며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계획과 뜻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시간적 틀 안에 갇혀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먼저 간 야고보는 불행하고, 조금 더 오래 산 베드로는 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시간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생각이지 시간에 갇혀 있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전혀 다른 것일 확률이 아주 높다.
사도들은 그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죽음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역에 임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시간과 상식을 초월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가 어떻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죽는다는 것이 꼭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실한 결론이 서니까 내일 당장 죽을 베드로가 엄청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무슨 얘기인가. 베드로가 잠을 자고 천사를 못 알아 본 것은 그가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그 기도를 했으면 천사를 보자마자 알아 봤을 터인데 못 알아 봤다. 왜인가. 그는 본인이 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에 그가 돌아 왔는데도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도는 무엇이었는가. “감옥에서 죽을 지라도 담대하게 해 달라는 것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행4:29,30) 그 기도의 응답으로 베드로가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죽음에 대한 겁이 없어졌기 때문이고, 인생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제한적 사고를 넘어서는 것을 보는 신앙이다.
3) 하나님 나라의 시각
우리는 베드로는 기적으로 살아났기에 복을 받은 자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곧 순교한 야보고는 애석하고 안타깝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건강하고 생명을 연장한 것이 복이라는 차원으로 접근한다면 12장 이후의 베드로의 삶은 결코 복이라 할 수 없다.
그는 가정도 지키지 못했고, 막내 사도 바울에게 모욕을 당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일도 겪었으며(갈2장), 결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먼저 간 야고보가 오히려 부럽고 복이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복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시각과 그의 나라의 관점으로 봐야 성경이 그토록 외치고 있는 복이 눈에 보이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이것에 묶이지 않고 마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라고 세상에 외쳤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된다면 새로운 2021년의 한 해가 성경이 요구하는 참된 복과 감사와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죽음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3. 내 현재 위치에서 나에게 주어진 신자의 사명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인가.
4.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복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어떤 것을 받고 싶은가.
5. 내가 베드로라면 자신의 삶에 대하여 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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