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요셉으로 대변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 관점으로 본문을 대하면 미처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셨던 많은 일들이 이해가 될 것이고, 또한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삶에 나를 대입하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고 계시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요셉의 역할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눈물 속에서 이집트로 팔려간다.(37장)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올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집트에 온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 것은, 죄 없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 되어 고난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39:20), 총리가 된 요셉이 온 땅을 다스리며, 야곱의 집이 구원을 받게 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사, 전권을 회복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41장)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을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로 하여금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서 결국에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은 죄를 다시 보게 하고, 스스로가 이 죗값을 치러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즉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구원 받은 자가 통과해야 할 ‘회개’라는 과정을 겪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 속에 요셉이 뒤에 있었다.
이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는 방법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하는 방법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전혀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를 먼저 사랑했다.(요일4:19) 그러나 그의 사랑은 우리가 죄를 지은 그 모습으로 그냥 두지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의 자리로 인도한다.(롬2:4) 그렇다면 회개한 자들은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인가.
● 구원과 율법과의 관계
이 질문의 답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맘대로 살아도 된다. 하지만 맘대로 살면 안 된다’이다.
1) 맘대로 사는 부분; 구원(신분의 변화): 우리의 구원은 행위와 상관이 없다. 내가 이전에 죄인이었으나 십자가의 은혜로 의인으로 불림 받는 부분, 죄의 종이었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부분, 즉, 신분이 변화되는 것은 내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엡2:8,9)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것을 믿기에 자신의 삶에 대하여 방종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구원을 받았기에 오늘 내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구원파’이다.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2) 맘대로 살지 못하는 부분; 성화(수준의 변화)
구원 받은 자는 절대로 맘대로 살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으로 본을 보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딤전4:12) 예수님은 믿는 자는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다(마10:38) 신자는 예수님이 행한 것을 본을 삼아서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벧전2:21,22.요일2:6)
왜 행함을 강조하는가.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수준을 보고, 하나님의 수준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지키고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가장 원하는 삶의 방향을 축약해서 보여 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율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율법의 정신, 목적과 방향을 취해야 한다.
하나님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반드시 요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의지하는 세상의 무언가를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한다. 그것이 바로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에게 ‘베냐민을 내게 보내라’는 요구이다.(창42:34)
이러한 과정 속에 유독 한 사람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것은 유다이다. 이 유다는 부패한 인간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가 베냐민을 대신 하여 이집트에 담보로 남겠다는 선언을 한다.(43:9)
● 유다; 부패한 인간의 상징
유다는 요셉을 은을 받고 팔 것을 제안한 사람이다. 마치 가룟 유다같고, 죄의 종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본장에서는 그에게서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 야곱 앞에서는 형제들을 대신하여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내려놓게 한다. 또한 요셉 앞에서는 형제들을 대신하여 형제들의 처한 상황을 그대로 요셉에게 고하여 용서를 구한다. 둘 사이의 가운데에 서서 이 둘을 화목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베냐민을 대신 하여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는다.
누구의 모습인가. 그에게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변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달리신 예수의 모습이 보인다. 죄인을 대신 하여 그 어깨에 죄를 짊어지고 감당하는 예수님이 보인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언제부터, 무엇을 계기로 그의 모습이 변화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고, 죄를 지은 자임을 인정하기 시작한 그 순간, 바로 진심으로 회개를 한 그 이후부터 그의 변화가 시작이 되었다.(42:21)
신자에게 있어서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성경은 과연 예수를 믿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한 시점이 있었냐는 것이다.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온 그 시점이 있었냐고 묻고 있다.
우리에게는 세리의 기도가 필요하다. 세리처럼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며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눅18:13)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마치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억울하게 만들고, 답답하게 하고, 가슴이 무너지게 하는 일들을 연출하셨듯이 계속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모습으로 빚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요셉의 의도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신자로서 가장 변화가 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3. 하나님이 나를 몰아가고 있다고 느낀적이 있는가. 왜 그러하셨다 생각하는가.
4. 복음을 바로 이해하기 전에 ‘율법(계명)’과 ‘하나님의 복’의 상관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었는가.
5.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한 경험이 있는가. 언제, 어떤 계기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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