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드디어 형제들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공개한다. 이것은 이제 그들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내일의 양식을 걱정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강대한 나라의 최강의 권력을 가진 이집트 총리의 형제가 되어 다른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요셉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시작된다.
●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요셉은 지속적으로 형제들에게 가까이 하려고 한다. 아버지 야곱도 모시고 와서 자신과 아주 가까운 고센 땅에서 살라고 권한다.(4,8,10절) 요셉의 형들과 요셉 사이에서 새로운 사귐이 시작된 것이다.
예전에는 그들에게 요셉은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큰 권력을 가진 이집트 총리였는데, 이제는 나와 한 가족이 되어 그가 가진 권력과 힘이 나의 든든한 백으로 선 것이다. 요셉은 이전과 똑같은 사람인데 나와의 관계가 바뀐 것이다. 그들이 이것을 인식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데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총리의 가족인데, 종처럼 살게 된다.
요셉의 형들이 그러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한 가족으로 마음에 품었는데 형들은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를 종으로 여기고 살았다.(50:18) 만일 우리 중에 하나님이 여전히 두려운 사람이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이집트 총리로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분의 자녀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에 오늘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깊은 사귐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 하나님의 섭리를 봄
요셉의 형들의 입장에서는 요셉이 자신을 드러낸 것이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전에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넘겼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요셉은 ‘이 모든 상황은 당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설명한다.(8절) 즉, 형제들은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요셉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알지 못하고 묻힐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요셉의 의도대로 잘 따라와서 요셉과 가까워지니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간사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에게는 늘 적극적으로 행하시고, 이끌고 계신다.
이것을 아는 인생과 모르는 인생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로 크다. 요셉은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형제들에게 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 자에게서 나오는 태도이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노력한 결과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약속한 결론에 이르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열심을 내지 않은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이며, 실패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간에도 일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어떤 인생을 걷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실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흉년과 같은 험악한 상황이 내 앞에 놓일지라도 흔들림이 없다.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담대함으로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시23:1) 이 섭리를 깨달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무언가를 요구하신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행함’이다.
● 행함을 요구
간혹 오래된 신자에게 보이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성경읽기, 성경공부, 기도, 모여서 은혜 나누기, 간증하기, 간증듣기를 좋아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이다. ‘이것으로 족하도다’이다. 형제들이 요셉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아버지 야곱에게 전한다. 그에게는 이 소식이 복음이었다. 그 때 야곱은 그 얘기를 듣고 영혼이 소생한다.(27절) 그리고 그의 첫 반응이 ‘내가 족하도다’였다.(28절)
여기까지의 모습을 보면 야곱은 우리와 똑같다. 복음을 들으니 족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족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것은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라고 한다.(28절) 그는 복음을 듣고 영혼이 소생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요셉이 있는 곳으로 갔다. 행동으로, 실천으로 복음이 사실임을 몸소 체험하기를 원한 것이다.
복음을 듣고, 알고, 깨닫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그것이 진리이고 사실임을 내가 직접 행함으로 확인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삶의 태도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여기가 좋사오니’이다. 나는 이미 충분히 영혼이 소생하고 이곳에 만족이 있는데, 왜 굳이 이집트까지 가야하냐는 것이다.
그럼, 복음을 전하고 행하는 과정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내 마음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일이 벌어진다. 요셉의 형제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의 마음이 흔들렸다.(24절) 이제 모든 것이 안정되었는데 요셉이 있는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세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요셉이 있는 곳에 가면 이전과는 다른 삶이 주어진다. 굳이 가나안 땅을 아쉬워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세계가 열리게 될 것이다.(20절)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가나안 땅이 아닌 요셉과 함께 하는 땅에서 취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종으로 살고 있는가. 왜 그러하다고 생각하나
3. 나의 삶이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있다고 강하게 느낀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보라
4. 내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5. 기독교의 세계관은 세상의 세계관과 충돌한다. 어느 부분이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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