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이야기는 앞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는 이야기의 연장이다. 요한은 이 이야기의 실례를 들기 위하여 맹인을 등장시켰다.
● 맹인과의 만남
예수님이 맹인을 만나서 고친 사건은 아주 완벽하게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맹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이 맹인은 예수님에게 병 고쳐주기를 간구한 적도 없고, 그가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을 보인 것도 아니다. 단지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치료하여 구원하셨다.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 나의 노력과 의지로 진리를 탐구하다가 예수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나에게 찾아오셔서 부르신 그 결과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본문의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 선천적 맹인은 사고 혹은 병으로 인하여 시력을 잃은 후천적 맹인과는 다르다. 선천적 맹인은 빛이 주는 유익과 편의를 모른다. 계절의 변화가 주는 아름다움과 무지개의 화려함이 주는 감동을 모른다. 바로 우리의 상태가 이러하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세상에 살고 있고 그런 세상에 적응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대하는 고통과 괴로움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와서 죄가 없는 세상을 소개하며, 그곳은 눈물과 한숨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모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그렇게 가고 싶은 생각도, 나에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를 믿기 전의 우리의 영적인 상태이다. 스스로가 영적으로 맹인인 줄도 모르고, 참된 자유가 뭔지 모르고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셨다. 먼저 다가 오셔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고, 우리를 빛 가운데 살게 해 주신 표본이 바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사건이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우리가 얻은 구원이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일이다.
● 구원 방법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병자를 고칠 때에 주로 말로 치료하셨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독특하다.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라서 고쳤다.(6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흙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아담이다. 히브리어 아담은 사람 이름이면서 또한 동시에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진액을 상징하는 침과 인간을 상징하는 흙이 섞여 어우러져 우리에게 입혀질 때에, 죄로 인하여 가려진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됨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그의 보혈이 나와 하나가 되어 죄인인 나에게 옷 입혀 질 때에 비로소 의인으로 불림 받아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서 볼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침을 흙에 뱉어서 진흙으로 이기는 모든 과정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맹인이기 때문이다. 단지 예수님이 다 해 놓은 다음에 치료라는 결과만 선물로 받았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 그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 그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게 되었음을 전혀 몰랐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혼자 이루신 사건이고 그 분의 플랜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얻은 구원이다.
그럼, 이 맹인이 구원 받은 시기는 언제인가. 믿었을 때가 아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찾아오셔서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발랐을 때이다. 물론, 우리는 창세전에 구원을 받았다.(엡1:4) 하지만 인지가 가능한 시점은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이다. 그 때가 구원의 시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었을 때에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게 인식과 실제의 차이이다.
이 맹인 역시 믿음의 고백을 한 것은 치료 받고 한 참이 지나서이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그에게 찾아왔을 때에 그 때 비로소 믿음의 고백을 한다.(37절)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자각도 없는 나에게 찾아와 결국에는 믿음의 고백을 받아 내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럼, 믿은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구원, 그 이후
구원에는 두 영역이 있다. 신분의 변화와 수준의 변화이다. 신분의 변화란 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면 족하다. 내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구원 받은 이후의 수준의 변화는 다르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걸맞는 수준의 변화는 나의 피나는 노력과 의지와 결심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룩을 요구하신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기 전보다 믿은 후의 삶이 훨씬 고달프다. 왜냐하면, 이제 내 방법,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살도록 우리를 계속적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이제 맹인의 삶을 보자. 그는 믿은 후에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난다.(34절) 이제 더 이상 그 사회에서 살지 못한다. 구걸도, 취직도 못한다. 맹인이었을 때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이제는 먹고 사는 걱정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쫓겨난 후에 예수님을 만났는데 원망을 하지 않았다. 믿음의 고백을 했다. 신자가 당면한 현실의 어려움을 개의치 않고 어렵더라도 신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믿음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택하는 신자로 우리를 빚어 가신다. 그것이 우리가 얻은 구원이요. 신자의 특권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예수를 믿은 후에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거나 보게된 영적인 눈이 있는가
3. 믿은 후 내가 자유하게 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4. 예수를 믿은 후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은 무엇인가.
5. 10년 전과 비교하여 달라진 수준의 변화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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