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의 정의는 ‘일정한 약속이나 목표를 꼭 실천하겠다고 다짐함’이다. 맹세를 어긴다고 해도 그다지 큰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구약에 보면 맹세가 허락 되어 있고, 때로는 오히려 맹세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레30:2) 신약의 바울은 맹세와 다름없는 ‘내 목숨을 걸고’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고후1:23)
더 아이러니 한 경우도 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맞느냐?’라는 질문에 아무런 문제 삼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하셨다.(마26:64) 이쯤되면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단순히 맹세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맹세에 관한 ‘실제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을 살펴 본다.
● 실제적인 부분
구약에서 사용되던 맹세의 의미는 ‘어떤 사실이나 일에 대하여 자기보다 더 큰 존재를 언급해서, 그 높은 존재를 증인 삼는다’이다.(히6:16) 이런 이유로 모세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가르쳤다.(신6:13)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맹세를 인정하고 독려했던 이유가 있다. 당시는 광야 시대이다. 광야에서는 서로를 의지하고, 신뢰해야 광야 생활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면 전혀 의심하지 말고 받아 들여야 힘든 광야 생활을 이겨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지시를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축을 잠시 이웃에게 맡겼을 때 그 맡긴 동안에 가축이 죽거나 상하면 맡았던 이웃에게 배상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 때 그 맡았던 자가 ‘내가 이 사람의 가축을 손대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맹세하면 가축 주인은 무조건 그 사실을 믿어야 했다. 배상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 말의 진의를 믿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맹세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남발했다. 이로 인해 맹세를 해도 서로 잘 안 믿는 풍조가 자리 잡게 됐다. 더 황당한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맹세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맹세와 안 지켜도 되는 맹세였다. 성전과 제단으로 한 맹세는 안 지켜도 되고, 성전의 금과 제단 위의 제물로 하면 지켜야 했다.(마23:16,18)
왜 이런 법을 만들었는가. 이는 전쟁 시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맹세를 하더라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명세 편법을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 사이에는 거짓 맹세가 만연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이 절대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연관이 되어 있기에 일체 아무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대노하셨다. 당시에 이들이 하는 그 거짓 맹세는 십계명에서 금지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요(3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9계명)을 어기는 것이었기에 더욱 강력히 금지하셨다.
사실 이 말씀은 절대로 맹세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반드시 지키라’는 뜻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표현으로 질책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실제의 우리의 삶에서는 맹세를 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맹세를 해야 할 정도의 일이면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 남발하는 맹세대신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것은 단지 ‘옳다. 아니다’라는 수준으로 말하라고 하셨다.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죄로 여기셨다.
왜 이런 제안을 하셨는가. 그것은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벌어질 그 어떤 일도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를 보라. 베드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에게 맹세를 했다. 자기 목숨을 다하여 예수님을 지킬 듯이 말을 했다.(마26:35) 하지만 결국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그를 부인했다.(마26:74)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의 장래 일은 그 어느 것도 우리 손에 있지 않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실제적 이유이다.
● 영적인 의미
성경에 나온 맹세 중에 가장 처절하고 무시무시한 맹세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맹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창함과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시며 약속하셨다.(창15:17) 이 약속을 당신의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는 맹세였다.(창22:16)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났다.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를 않았다. 그 때 하나님은 당신이 한 맹세를 기억하셨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대로 본인이 그 짐승처럼 쪼개지기로 작정하시고 그 때 한 약속 그대로 행하셨다. 그게 바로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죽으심으로 당신이 한 약속,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게 하겠다는 약속을 이루어 내셨다.(창22: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믿음의 자손 안에 서게 되었다.
이제야 우리는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도 없이 맹세를 했지만 지킨 적이 없다. 항상 반역하고, 배반하고, 실패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제는 너희가 더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대신 그가 다 이루어내겠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실패, 나의 모자람, 나의 연약함을 하나님이 채워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은 반란자에 불과하다. 지난 1,500년 동안 잘 지켜온 율법을 폐하는 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는 자가 아니다. 완성하는 자이다.(마5:17) 예수님은 ‘맹세를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시며, 본인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언약과 율법을 등에 지고 십자가에서 이루겠다는 확고한 표현이 바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영적인 이유이다.
베드로는 실패했다.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한 그 맹세와 약속을 뒤로하고 배신했다. 그런 형편없는 자를 예수님은 버리지 않았다. 십자가 사건 후에 그를 찾아와 그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성공의 인생으로 이끌어 주셨다. 그것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니다. 전적인 예수님의 의지요, 노력이요, 그의 희생의 결과이다. 그것이 바로 ‘맹세하지 말라’는 말에 담겨진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해명하고 싶을 때에 내가 주로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동은 어떤 것이 있는가
4.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내가 취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5. 하나님께서 나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주신 사례가 있다면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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