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된 사울이 이제 본격적으로 기독교 사역을 시작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나타난 사울의 행적을 통하여 신자의 삶의 변화와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펴본다.
1. 다시 보게 된 사울
사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다.(18절) 이것은 사울이 복음을 알기 전과 후의 기점이 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비늘’은 그가 세상을 볼 때에 필터를 갖고 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율법을 볼 때에 ‘이것을 지켜야지만이 구원이 있다’는 패러다임으로 봤는데 그것이 벗겨졌다는 것이다.
‘다시 보다’는 헬라어로 ‘아나블레포’이다. 이 말은 ‘아나(위) + 블레포(보다)’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까 ‘다시 보다’라는 말과 ‘위를 보다’라는 말은 정확히 같은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사울은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넘어서 이제 ‘그의 시선이 하늘을 향하게 되었다’ 즉,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라는 의미이다. 이 눈을 뜨는 과정을 나타낸 17절은 굉장히 중요하다. 신자는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바른 신앙을 갖게 된다.
1) 안수
이것은 물리적으로 ‘손을 얹는 일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에 안수는 ‘축복할 때’ 혹은 ‘내가 지은 죄를 짐승에게 전가할 때’ 사용했다. 지금 사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는 것은 정확히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됐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될 사울을 축복함과 동시에 그의 지난 세월이 죄인이었음을 인정하여 그 짐승의 자리, 곧 죄인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을 뜻한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의 출발은 ‘내가 복을 받기 원합니다’라는 것 이전에 반드시 이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결코 내 힘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있는 자가 ‘기독교인’으로 첫걸음을 시작한 자이다. 절대로 이 과정을 스킵하면 안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고 눈에 있는 비늘이 벗겨지게 된다.
2) 예수가 보임
본인이 죄인임을 깨달은 자는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 때 비로소 예수님께 시선이 간다. 이를 통해 그분에게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고백을 하는 자가 된다.
3) 아나블레포(위를 봄)
그 다음 과정은 하늘에 시선을 두는 자, 영적인 자가 된다.
4) 성령 충만의 삶
하늘의 시선을 둔 자는 ‘성령 충만’의 삶을 살게 된다. 성령 충만은 외부에서 무언가 쏟아부어지는 힘이 아니다. 내 안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을 바라보고 그의 힘으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신앙인의 삶이란 반드시, 꼭 이 과정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어느 것 하나 빠지거나 바뀌면 안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꾸로 가려고 한다. 내가 신자의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예수를 만나려고 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사울이다. 변화된 바울로 가려면 항상 죄의 고백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되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성령 충만의 삶으로 갈 수 있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것을 통해서 영적인 것을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잘못 가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이 회복이 되어야 영적인 것이 회복된다. 그 다음에 물질적인 것, 현상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2. 헌신하는 사울
이 과정을 겪은 사울은 무섭게 헌신한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사울의 헌신을 보며 ‘나도 주를 위하여 헌신하자.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헌신이다’라고 묵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성경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과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나의 헌신과 세상의 복을 같은 선상에 두면 안 된다.
사울은 헌신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사울은 목숨을 내놓고 헌신을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세상적인 보상을 받은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헌신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신다. 하지만 그것을 세상적인 복을 주시는 것으로 공식화하면 안 된다. 성경은 결코 그것을 중심 내용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를 위하여 헌신하였던 성경의 위인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훨씬 더 세상의 고난을 경험한다. 그것이 사실(fact)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인간은 극단의 한계를 만나야지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는 방법은 인생의 낙심과 절망을 빼 놓고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
사울은 죄인 된 자신의 본질과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확인한 후로는 자신의 헌신을 두고 하나님과 딜(deal)을 하지 않는다. 그가 고난을 통해 주님을 경험해 보니 하나님은 내 인생을 이렇게 쏟아 부어도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모든 사람이 나 같이 되기를 원한다’(행26:29)는 말을 한다. 이는 곧, 고난을 받느냐 안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한 인생으로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변화이다. 그가 쓸모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확인한 자로 그의 전 인생이 채색이 된 것이다.
3. 우회하는 사울
우리는 사울의 행적을 읽으며 그가 변화 받은 즉시 바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사울이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해서 그의 도망자의 인생이 시작된다.
그가 기독교 공동체에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변화 후 약 14년 만이다.(갈2:1) 아라비아에서 3년, 다소에서 10년, 물론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에서 1년을 같이 사역을 했지만, 13년 시간은 무명의 사역자로 혼자 지냈다. 왜냐하면 그가 변화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아서 그를 만나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10여년의 시간은 실패였고, 절망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기간에 홀로 예수님과 구약을 연결하는 신학을 완성했고 그의 신학을 신약 성경 서신으로 쏟아냈다. 그것이 우리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 우리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의 차이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있다. 이 과정 속에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교회가 평안해 지고, 든든히 서 가고, 교인의 수가 많아졌다고 한다.(31절)
무슨 말인가.
교회의 부흥에 실제적으로 사울이 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울은 마음과는 다르게 실제적으로 초대 교회의 초반에는 교회에 보탬이 된 일이 없다. 성경은 교회의 부흥의 원인을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에 있다고 얘기한다.(31절)
무슨 뜻인가.
교회의 성장은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 누구를 통해서도 이 일을 행하실 수 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 일에 택함 받았다는 것으로 인해 그토록 그의 삶에 기쁨과 감사가 넘쳤던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한 자가 누릴 수 있는 신자의 영광된 삶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죄가 많구나... 죄인이 맞구나...라고 느낀 때가 있었는가. 만일 그러하면 언제인가.
3. 내 믿음이 흔들릴 때는 언제인가. 주로 무슨 일이었는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4. 신앙을 가진 후 가장 큰 보상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만일 세상적인 보상이 없다면 나의 반응은?
5. 내가 바울이었다면 14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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