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기록된 주된 목적은 삶의 교훈이 아니다. 영혼 구원이다. 그 영혼 구원의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책이다.(눅24:44) 본장에서 요셉을 통하여 보는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살펴본다.
● 견딤
요셉은 견디는 인생이다. 모든 것을 포기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는 견딘다. 형들의 배신과 보디발 아내에게 당한 그 수모 속에서도 견딘다. 그런 그에게 희망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은 그가 있는 감옥의 같은 방에 이집트 고위 관리(술관원, 떡관원) 두 사람이 수감이 된 것이다.
그 때 친위대장(보디발)이 요셉에게 이 두 사람을 섬기라고 명령한다. 이것을 보면 보디발은 요셉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내를 범하려했던 노예를 살려두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실을 밝히면 자신의 체면과 신임이 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으로 인하여 요셉을 가둔 것이다. 즉 요셉의 무고함을 알고도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죄인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요셉은 옥 안에서 이 두 관원의 꿈 해몽을 한다. 그 내용은 술관원은 복직하고, 떡관원은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다. 이에 요셉은 복직을 하게 될 술관원에게 자신의 처지를 바로에게 알려서 출소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의 해몽대로 술관원은 복직했다. 하지만 요셉의 부탁을 잊었다. 그렇게 만 2년이 지났다. 그는 이렇게 형제들에게, 보디발에게 그리고 심지어 술관원에게도 배신을 당했고 이 모든 상황을 버텨냈다.
요셉의 이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다. 빌라도는 그가 죄가 없음을 알았다.(요18: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를 유다만 배신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도 배신했고, 그를 따르던 수 많은 제자들도 다 배신했다. 요셉이 감옥에서 발에 차꼬를 차고 몸이 쇠사슬에 매였듯이 예수님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예수님과 요셉이 다른 점이 있다. 인간 요셉은 이 고난의 상황이 자신의 꿈이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는 형제들이 찾아와 절을 하는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것에는 약 2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왜 요셉에게 이런 긴 시간이 필요했는가. 물론, 이 고난의 기간을 통해서 그의 인격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많이 다듬어졌다. 17살 때에는 꿈을 형제들에게 ‘자신의 꿈’이라고 했으나, 이제는 바로에게 ‘꿈은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말을 한다.(41:25) 그가 좀 더 성숙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격이 변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으로도 시간이 지나야만했다. 만일 술관원이 2년 전에 바로에게 요셉의 억울함을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억울하게도 술관원이 요셉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바로의 꿈을 해몽할 수 있었고, 결국 총리가 될 수 있었다. 그 2년은 요셉에게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다.
이를 역사적 배경의 관점으로 본다. 성경학자들은 이 기간에 이집트가 토착 민족인 함족의 왕조에서 힉소스 왕조로 바뀌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힉소스 왕조는 셈족이다. 히브리 민족이 셈족이다. 함족과 셈족은 피부톤이 다르다. 만일 이집트가 토착 왕조의 시기라면 피부색이 다른 셈족을 고위관리로 임명할 가능성이 없다. 그러니까 이 13년의 긴 요셉의 고난은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요셉은 그것을 몰랐기에 버텨야 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큰 그림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영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큰 사명을 알았기에 요셉처럼 버틴 것이 아니라, 목표와 희망으로 인내의 수고를 감당하신 것이었다.(히12:2) 이번에는 요셉으로 보는 그리스도의 사역적인 측면이다. 그는 어떻게 사역을 했는가.
●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꿈을 통하여 앞으로 벌어질 일을 계시하셨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행위’이다. 당시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 그래서 꿈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했다. 그렇기에 바로의 꿈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요셉은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해서 전해주었다. 즉, 요셉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풀어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이다. 예수님이 3년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전하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내용이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것이라 선포하셨다.(눅24:44) 그리고 예수님의 관점으로 모세의 계명에서 말한 살인, 간음, 원수 사랑 및 율법과 예수와의 관계를 재해석해서 당신의 백성에게 전하셨다.(마5:17)
그러니까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모습은 후에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분의 뜻을 전하는 일로 사역하는 것을 미리 보여 준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의 모든 것에 정통한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면, 또한 말씀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다 헛것이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몽땅 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율법사들은 평생을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에 관하여 모든 것을 통달하고 있지만 해석에 결정적인 실수를 한다. 그것은 율법을 도덕적, 윤리적인 차원으로 이해했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는 관점을 놓친 것이다. 그래서 정작 말씀이 가리키는 그 분, 그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와도 못 알아 본 것이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통하여 성경을 보고, 그 분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눈이 필요하다. 그것이 요셉과 예수님의 사역이었다.
요셉은 철이 없고, 자기 자랑에 빠져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과 동시에 고난과 배신을 당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한다. 이 요셉을 통하여 바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41:39) 이것은 세상이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요14:9)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숙제가 있다. 그것은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라면 너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하라’는 것이다.(벧전2:12)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전하는 일이 곧 우리가 받은 사명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당한 가장 큰 배신이 있었는가. 그 일로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3. 당시의 어려움이 시간이 지난 후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 느낀 일이 있었으면 나누어 보라.
4. 하나님의 큰 그림을 알고 견디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5.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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