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남편과 세 자녀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그 고멜을 찾아가서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를 알려주셨다. 그것은 ‘사랑하라’는 것이다.(1절)
사실 하나님께서 처음에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지시하실 때에는 단순히 ‘맞이하라’(호1:2)고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차원 더 높은 헌신과 희생을 그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당신의 집요한 사랑을 보여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럼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 사랑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행해야 할 사랑의 실천은 무엇인가.
1. 대가를 치름
고멜은 호세아의 아내이다. 그런데 호세아가 집나간 자신의 아내를 찾아서 집으로 데리고 오는 과정 속에서 이상한 점을 하나 볼 수 있다. 그것은 호세아가 아내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데려오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경우에 그렇다. 먼저, 고멜과 바람난 남자가 창녀촌에 그녀를 판 경우다. 그래서 포주에게 돈을 내고 다시 사온 것이다. 또 다른 경우가 있다. 그것은 고멜이 집을 나갔다가 노예로 팔린 경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가. 그것은 호세아가 지불한 금액이은 30세겔(은15 + 보리 한호멜 반)인데, 이것은 당시 성인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다. 이를 통해서 고멜이 노예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호세아 입장에서는 자기 아내였던 자를 남에게 돈을 주고 사온 것이다. 성경이 뭘 얘기하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공짜로 얻은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가 얻은 구원을 자꾸 스스로 평가절하 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노력한 것이 없기에 그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다른 종교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공짜가 아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호세아가 몸값으로 지불한 금액이 은 30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은 30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판 가격과 같다.(마26:15) 즉, 호세아가 고멜을 위하여 지불한 이 은 30은 예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피로 대가를 치르셨다. 우리는 마치 바람난 고멜처럼 남편된 하나님의 품이 싫다고 떠났다. 이로 인하여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런 우리를 은 30으로 비롯된, 그 십자가의 희생을 치르고 우리를 건져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얻은 구원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속량(redemption)했다고 말한다.(롬3:24) 이 ‘속량’은 노예 상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자유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구원을 값없이 얻은 것이 맞다. 하지만 공짜는 아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대가를 치렀다. 그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 신앙의 시작이다. 그것이 바로 호세아서에서 보여주는 대가를 치른 사랑이다.
2. 기다림
호세아는 아내를 죄악 된 곳에서 구출한 후에 그녀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이제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자. 음행도 하지 말고, 다른 남자를 좇지도 마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지막에 ‘나도 너한테 그렇게 할께’라고 한다.(3절) 호세아는 부정한 아내를 데리고 와서 상당한 기간 동안을 근신하도록 그녀에게 권고한다. 고멜이 완전히 변화가 될 때까지 긴 시간을 두고 지켜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의 변화는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음탕한 고멜을 단번에 어느 순간에 단번에 변하여 다른 사람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긴 시간을 주고 천천히 변화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그리고 ‘나도 그러하리라’라는 말로 하나님이 그 긴 기간을 고통 속에 우리와 함께 있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 품을 떠났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변화되도록 이끄시고 고통 속에서 함께 걷겠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는 사건이요. 성령의 내주이다.(요일4:4) 이것이 ‘많은 날 동안에 나와 함께 지내자라’는 의미이다.(3절)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림’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배우려면 기다려야 한다. 변화를, 깨닫기를 기다리고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것으로 승화될 것이다.
3. 굳은 의지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불러서 당신의 사랑을 회복할 것을 약속하신다.(5절) 많은 경우에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의 은총을 향해 가야 하는 결단의 구절로 소개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뜻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마지막이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라’라는 명령문이 아니다.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라는 미래형 시제이기 때문이다.(5절)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내치지 않고 단련하여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만들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이다. 이것은 마치 호세아가 고멜을 긴 시간을 두고 그녀를 참된 아내와 귀한 엄마로 만드는 것과 동일하다. 이 과정은 고멜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다. 전적인 호세아의 의지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의 변화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의 의지로 이들을 빚어갈 것이고, 결국에는 완성할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다윗의 왕을 찾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의 은총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한다.(5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흩어져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들을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게 될 것을 말한다. 이 예언은 이로부터 700년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를 믿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의 이름 아래 모은 시작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잘남과 노력과 결단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굳은 의지로 말미암아 이루어낸 사건이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꽃 피울 때에 이루어진다.
다윗은 시편 23편을 통하여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마지막 그 순간까지 따를 것을 노래한다.(시23:6)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확실한 일이라는 것을 약속하시며 그 증표로 보여 주신 것이 ‘십자가’이다.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자.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반드시 이루리라고 약속하신 그 사랑의 실현이 우리의 생애를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배우자가 바람이 난다면 나는 어떻게 상대를 대할 것 같은가.
3. 내가 배우자를 위하여 치르고 있는 대가는 무엇인가
4. 하나님께서 나의 변화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으로 받을 수 있는 위로는 무엇인가
5. 하나님이 나의 아픔을 빨리 만져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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