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신분에 걸맞은 수준의 자리까지 계속적으로 인도하신다. 과연 하나님은 그들을 어디까지 인도하시며,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 야곱의 변화
야곱의 말년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위인으로 서 있다. 하지만 그것은 49장의 모습이다. 본장(43장)에서는 그가 여전히 아집이 강하고 신자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야곱은 고집이 세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신자의 모습을 대표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야곱을 다루시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일하시는 방법과 그들을 향한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이 아직 변하지 않은 모습은 무엇인가. 두 가지를 살펴본다.
1) 편애
야곱은 요셉을 아주 편애하였다.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형제들이 요셉을 판 것이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났어도 그가 가진 자식에 대한 편애가 여전하다. 이번에는 베냐민을 향한 편애이다.
2) 꾀
야곱은 꾀가 많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 맡기기보다 마지막 하나라도 자기의 머리로 무엇인가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는 이전에 형 에서를 만나기 직전에 아부성 뇌물로 성축 550마리를 형에게 보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똑같이 행한다. 이집트 총리인 요셉을 만나기 전에 뇌물로 그 땅의 소산들을 잔뜩 싸서 보낸다. 이 역시 바뀌지 않은 모습이다.
이런 그를 하나님이 끝까지 몰아붙인다. 그 결과 야곱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드디어 요셉에게 베냐민을 보내며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말을 한다.(14절) 이 고백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다.
야곱은 평생을 살면서 딱 세 사람을 사랑했다. 그것은 아내 라헬과 그녀에게서 나온 두 자녀(요셉, 벤자민)이다. 그는 그 중에 유일하게 남은 베냐민을 내려놓은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 주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결국 하나님이 야곱에게 원하는 것은, 자기 손에 붙잡고 스스로 주관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한 이 요구는 아주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차라리 이럴 바에야 선택 안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베냐민을 내려 놔야 요셉의 창고가 열린다.
왜 야곱에게 베냐민을 내려놓으라고 하는가. 그것은 베냐민을 내려 놔야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내려 놔야,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인다. 그가 말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는 고백은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는 것이다.
그가 이 고백을 한 후로 그토록 사랑했던 요셉과 베냐민을 다시 얻게 된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14절)
● 유다의 변화
이전에 요셉을 이집트 상인에게 팔자고 제안한 것이 유다였다.(37:26)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과 같다. 그가 요셉을 이집트에 팔 때에는 아버지 야곱이 어찌 되는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 요셉이 베냐민을 안 놓아주려고 하자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한다. 요셉에게, 베냐민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슬피 울다가 돌아가실 것이라고 하며 요셉을 설득한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유다는 요셉을 싫어했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자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라헬의 두 번째 아들 베냐민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베냐민을 대신해서 자기가 담보가 되어 이집트에 남겼다고 요셉에게 간청한다.(44:33)
무슨 말인가. 죄인을 상징하는 유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사건이 바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는 예수님의 예표이다. 이는 신자들이 결국에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자로 변화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행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일하심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손 안에 넣고 완벽히 통제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모르고 있다. 이들은 모두 요셉은 죽고 없는 존재로 생각했다.(37:33,42:13)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 생각하였고, 결국에는 요셉이 자신들을 억류해서 노예로 삼고, 나귀를 빼앗으려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요셉을 오해한 것이다. 실제로는 어떠한가. 요셉은 이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오히려 형제들을 돕기 위하여 사랑으로 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오해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피폐하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은 없다. 더 이상 내게 희망은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신다. 그리고 나에게 최선을 것을 주시기 위하여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지금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셉은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이렇게 행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의 꿈과 관계가 있다. 그는 자신이 꾼 꿈이 하나님의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요셉이 17세에 꾼 꿈은 열한별이 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재는 열 명 만이 와서 절한다. 베냐민이 와야 그 꿈이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이 꿈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일을 계획하고 벌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요셉이 이 일을 도모하였고, 결국에는 그 꿈이 실현되는 현장이 바로 그 열 한 명의 형제들이 비로소 요셉에게 절하는 모습이다.(43:26) 이것이 바로 2천년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이 땅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라는 그 분의 삶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요셉의 형들의 모습은 오늘도 이 땅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또한 이들을 주관하고 통제하고 있는 요셉의 모습은 이 시간에도 우리를 여전히 인도하고 이끌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이것을 보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하나님이 여전히 내가 변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가 나누어 보라.
3. 편애를 하거나 누군가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결과가 어떠한가. 왜 편애가 생기는가.
4. 부모에게 서운한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그 이유와 그 마음의 극복의 여부에 대하여 말해보라
5. 하나님이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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