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은 기독교의 절기 중에 가장 유명한 날이다. 성탄절에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런 마음이 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비천한 곳에 오셨다는 것이다. 태어난 곳은 마구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 잘 곳도 없었다. 더군다나 헤롯이 2살 아래의 만행으로 인하여 그의 부모는 아기 예수를 안고 쫓기듯이 다녔다.
그렇기에 성탄절에는 두 가지 마음이 올라온다. 그것은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할 만큼 위대한 탄생이라는 생각과 함께 거룩한 자가 너무나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애잔한 마음이다. 더군다나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박대했던 것에 대하여 비통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성탄절에 세상이 그를 홀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런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비천한 모습으로 오게 될 것이고,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할 것이라는 바로 그 예언대로 오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사1:3)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도였고 계획이었다는 것을 인지하면 이 성탄절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그 분의 이유와 섭리를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한다.(사9:5) 하나님은 그 선물에 이름을 붙이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이다.(21절) 하나님은 이 선물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 것이며, 우리가 그 선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설명하셨다. 본문을 통해서 알아본다.
● 예배할 이름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며 그 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강조한다.(18,20절) 호랑이가 새끼를 낳으면 호랑이고, 코끼리가 애를 낳으면 코끼리이다. 같은 맥락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그가 곧 성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4)라고 하셨다. 그렇기에 많은 경우에 예수님을 하나님께 내 소원을 이루게 하기 위한 좋은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도 등급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위치에 성부 하나님, 그 아래가 성자 하나님, 맨 아래가 성령 하나님이다.
이것은 오해이다. 아마다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용어로 인하여 세 분을 1위부터 3위까지의 자리로 인식한 결과인 듯 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위(位)는 자리가 아니다. 위격(인격)을 의미한다. 영어의 Trinity라는 말은 Three Persons, One Essence라는 말이다. 세 사람이 있는데 본질이 하나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다. 그는 태조부터 계셨고, 창조 때에 성부 하나님과 같이 창조 사역을 하셨다.(요1:1~3절,창1:26) 이에 대한 혼동이 있을까봐 구약의 이사야는 성탄의 예언하며, 그 태어난 아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다.(사9:6) 그가 바로 예배의 대상이요,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령으로 잉태된 자’라는 뜻이다.
● 능력의 이름
그가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다.(21절) 모든 인간은 반드시 이 땅을 떠날 날이 온다. 그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에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롬10:13)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죽어간 강도를 보라. 그는 교리도 알지 못했고, 침례도 받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따라가 기적을 행한 적도 없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단 한 마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그 한 마디에 구원을 얻었다. 내 숨이 다하는 순간에 ‘나를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라는 그 한 마디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리, 침례, 신학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여전히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을 위함이다. 내가 구원 받은 자라는 확증을 위해서이다. 내가 얼마나 불가능한 죄인임을 깨닫기 위해서이며,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는 가에 대한 지침이다. 내 힘과 능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능력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천국이 주어지게 된다.
● 전파할 이름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름이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능력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들이 받은 사명이 있다. 그것은 그 보배롭고 신비한 이름을 이 땅에 전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천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라고 가르쳐 준다. 그 이름은 천사를 통해 아내에게 전하여 진다. 그 후 목자들에게 그리고 동방박사에게 전해지고, 열 두 제자와 사도들을 지나 우리에게 전해졌다.(24절)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애가 타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3,14)
복음은 죽어가는 자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그 복음이 전하는 자가 없기에 못 듣고 죽어가는 자들이 우리의 곁에 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전파하는 이가 없기에 죽어가는 영혼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복음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그 능력의 이름, 신비한 이름을 온 땅에 전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대한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게 가장 기억에 나는 성탄절은 언제였는가. 왜 그 날이 기억이 나는가.
3. 내게 있어서 ‘예수’는 어떤 분이셨는가. 세 분의 하나님에게도 순위가 있다고 느끼는가. 왜 그런가.
4. 교리, 신학, 성경 지식이 내게 주는 유익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5. 내 주변에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 있는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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