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예수님의 세족식 그 후의 이야기이다. 세족식을 행한 목적은 무엇인가.
● 세족식을 행한 목적
세족식은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다. 구원 받은 이 후의 신자들의 삶에 대한 정확한 지침과 방향을 주기 위함이다. 신자는 매일의 짓는 죄 역시 예수님께 내어 놓아야 한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교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바로 십자가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8절) 그것이 신자가 갖는 큰 착각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없다. 신자의 가장 좋은 모범이라고 여겨지는 바울은 어떠했는가. 그 역시 ‘아무리 선을 행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롬7:19)고 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매일의 죄 역시 스스로의 힘이 아닌 나에게 맡기라는 의미로 세족식을 행하셨다.
이 세족식이 ‘섬김’을 교훈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명백한 근거가 있다. 예수님은 발 씻을 대상을 정해 주셨다. 그 대상은 세상이 아니다. ‘너희’이다. 즉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다.(14절) 심지어 가룟 유다는 그 대상에서 빠져있다.(18절) 단순히 섬기는 일이라면 굳이 유다를 뺄 이유가 없다. 그럼, 어떤 목적인가.
그것은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도 나처럼 십자가의 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될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섬기는 일은 세상의 기관들도 다 할 수 있다. 그들은 할 수 없으나 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를 전하는 일이다. 제자들은 그 일에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때 이미 알고 있었다. 본인이 무서운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제자들 역시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비장한 각오로 세족식을 행하시며, 너희들이 서로 이 일을 할 것에 대한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예수님이 자신을 발을 씻기신 것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발을 씻기며 다시 한 번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잡았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목적이다.
● 십가가 길의 의미
신자가 하는 모든 행동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해지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일을 행한 후에 그 일을 하신 이유가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말이다. 이런 예는 아주 많이 등장을 한다. 예를 들면 고향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기실 때(마4:13,14),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마13:34,35), 세족식 후 유다에게 떡을 준 이유(요13:18) 등 모든 것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 여러 예 중에 아주 놀라운 사실이 하나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목마르다’고 하셨다. 그 때 사람들이 해면에 포도주를 적시어 예수님께 드렸다. 이 해면이 무엇인가. 당시 이 해면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본 후 뒷물로 처리하던 용도로 사용되던 용품이다.
즉, 사람들이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드린 것은 예수님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멸이요. 조롱이었다.(눅23:36)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해면을 입에 대셨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었다.(요19:28) 이렇게 행하시고 바로 이어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기억하시고, 말씀을 행하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신자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고, 말씀대로 사는 모델이며, 말씀에 대한 순종을 보여 주신 표본이다.
● 베드로 vs. 바울
베드로는 언제나 주를 위하여 굉장히 열심을 내었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다에도 뛰어들 정도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칭찬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혼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인 열정은 모두가 다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칭찬하지 않으셨다. 무슨 말인가. 우리의 열심과 정열을 바치는 것이 곧, 신앙의 바른 삶이라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을 내는 것이 꼭 좋은 신앙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베드로처럼 아주 큰 열정을 가진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는 바울이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와 달리 자신의 감정대로 행하지 않았다. 또한 따뜻한 정감이 가는 스타일이 인물도 아니다. 그런데 그가 보이는 신앙의 행로들은 비겁하지 않다. 확신에 차있고,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자의 기쁨을 유지하더니(빌4:4) 결국에는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위엄을 잃지 않았다.
이 두 사람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말씀이다. 바울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이미 구약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예수의 행적을 파헤치며 말씀으로 그가 그리스도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가 했던 사역은 기적을 행하는 일이 아니었다. 회당에서 매일 같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행19:9)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한 경험이 중심이 된 신앙이다. 말씀이 없이 경험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었다. 그런데 그 역시 경험의 신앙에서 말씀의 신앙인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을 때에 그는 이 사건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말씀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모인 무리들에게 이것은 요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임을 선포했다.(행2:16)
경험의 신앙에서 말씀의 신앙으로 성숙케 된 것이다. 그 후 그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바뀌었다. 내 감정과 경험이 아닌 말씀 중심으로 신앙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 길을 가는 신자의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매일의 삶에 대한 회개를 잘 하는 편인가? 만일 아니라면 왜 하지 않는가.
3. 하고 싶지 않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행한 적이 있는가. 어떤 일이었고, 결과는 어떠했는가.
4. 십자가 상에서 받으셨던 해면이 화장실 용품이라는 것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5.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내는 일이 문제가 되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어떤 경우에 그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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