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쓰인 단어와 용어도 쉽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요한이 전한 말씀 중에는 깊은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특별히 서로 앞뒤가 맞지 않은 구절이 등장할 때는 당황스럽기도 하다.(5:31,8:14, 13:36,14:5,16:5 etc...)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관점의 차이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제자들이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16장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상식과 원리를 완전히 깨부수는 말이 등장한다. 그것은 ‘기도’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면 받게 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24절)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성경은 얘기한다.(롬8:34)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좋은데, 그 말이 곧,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대신 구하겠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얘기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 얘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기독교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말이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라고 하며(딤전2:5) 히브리서 기자는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신다고 했다.(히7:25)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인간의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 기대의 차이
모든 문제의 시작은 이들이 예수님을 향한 기대와 실제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들의 죄를 지고 대신 죽기 위해서 왔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그렇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왔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메시야다. 여기서부터 잘못되었기에 모든 것이 다 꼬였다.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며 나를 보리라’하셨다.(16절) 결과를 아는 우리는 이 말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러나 제자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실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신자 중에 예수를 믿은 후에 계속해서 실망을 하고,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유익함이 없고 피곤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딱 이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것과 실제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이루려고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른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들이 전혀 내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기쁨’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벌어지는 슬픈 일을 막아주고, 없게 해 주는 것을 통하여 기쁨을 얻기를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슬픔과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신다.(20절)
예수님은 너희가 곡하고 애통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하신다.(20절) 이것은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 죽음을 피하는 것으로 기쁨을 주지 않는다.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을 이루게 하시는 것으로 기쁨을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수준의 변화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영적인 근육을 키우기 위함이다. 육신의 근육을 키우려면 무거운 것을 들어서 근육이 찢어져야 한다. 찢어짐은 고통이다. 그러나 이 고통이 수반 돼야 근육이 단단해지고 두꺼워진다. 영적 근육 역시 고통을 통하여 단단해진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없이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는 자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단단해지고 성숙해진다. 영적인 근육이 붙는 것이다.
● 주권의 차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서 정성을 다해 신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 분의 열심과 정성으로 인간을 감동시키고 설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이루게 하신다. 이것이 타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극명한 차이이다.
이것으로 내가 가진 신앙을 판단할 수 있다. 내가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고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함이면 이방종교이다. 반면에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내 삶 속에 찾아오신 그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면 기독교 신앙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독립이라는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정성을 다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면 민족을 구원할 영웅을 보내 줄 것을 기대했다. 그것이 메시야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내 열심과 정성을 보고 본인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 땅에 이루실 일을 결정하셨고, 그 분의 뜻대로 진행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26절) 하지만 이 말은 액면 그대로의 뜻이 아니다. 실제로도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바로 다음 장 17장에서는 예수님이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것이 계획 아래, 그 분의 주권 아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 한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조차도 예수님이 이 일을 행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다.(엡1:4)
구원은 내 종교심의 분량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무게와도 상관이 없다.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 사랑을 입은 자이고, 이 인도하심 안에 있다. 결코 내 운명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사망이나, 멸망의 길로 가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이해가 가지 않았던 성경 말씀이 관점이 바뀌면서 해결된 것이 있는가.
3. 고통을 통과한 기쁨과 누군가에 의하여 주어진 기쁨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4. 설교 말씀에 근거한 내 신앙은 이방 신앙인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인가.
5. 내 삶의 평강과 기쁨을 앗아가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내가 이것을 이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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