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열 두 아들을 불러서 축복한다. 이것이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큰 윤곽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야곱의 축복이 실제적으로 보면 축복인지, 예언인지, 유언인지 심지어 저주인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사실 여부를 살펴본다.
● 르우벤, 시므온 & 레위
열 두 자녀 중에 이 세 사람은 유독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받았다. 르우벤은 탁월하지 못하게 되고, 시므온과 레위는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 놓는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를 겁탈한 적이 있다.(35:22) 아버지의 아내를 겁탈한 행위는 당시의 문화를 보면 아들이 아버지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을 말한다. 이 일로 르우벤은 장자권을 잃는다.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간다.(대상5:1)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이 세겜에서 강간을 당한 일로 세겜의 남자들을 칼로 살육한 적이 있다.(5절) 그 일에 대한 결과로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짐을 당하게 될 것을 예언 받는다.(7절) 이 예언은 약400년이 지난 후에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때에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땅 안에 배정을 받고 후에 세력이 아주 미약해 진다.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48개의 성읍에 흩어진다.
이것은 분명히 저주에 가깝다. 그런데 왜 이것을 축복이라 두 번을 강조 하는가.(28절)
그 이유는 이렇다. 야곱이 보기에 르우벤은 끓는 물같다.(4절) 이 말은 그가 안정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야곱이 보기에 그는 장남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자로 여긴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쉽사리 칼로 표현하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이 세 아들이 각자 장자의 복과 땅의 복을 받게 되면 그들의 인생은 그들이 가진 성격의 문제로 피폐해 질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이것을 담을 그릇이 되지 않는데 부어지면 그것은 해가 된다. 그래서 야곱은 그들을 위하여 물질의 복을 삼갔다. 주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무엇 보다 이들이 받은 비교가 안 되는 큰 복이 있다. 그것은 쓰임을 받은 복이다.
이 세 사람의 행동은 세 단어로 말할 수 있다. 반역, 거짓, 살인이다. 이 세 가지는 사탄, 마귀의 본성이다.(사14:13,요8:44) 무슨 말인가. 이들이 한 짓은 사탄과 다름이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야곱은 이들을 내치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품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주춧돌이 되게 했다. 이것이 큰 은혜이고, 축복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행하실 일이다.
● 요셉
요셉은 르우벤을 대신하여 장자권을 받는다. 그런데 정작 메시야는 요셉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유다지파에게서 나온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다. 그런데 다윗은 요셉 지파가 아니다. 유다 지파 사람이다.(삼하2:4) 그런데 왜 야곱은 장자권을 요셉에게 줬는가.
이것은 ‘왕권’과 ‘장자권’의 차이다. 이 두 권한은 둘 다 권위와 지도력을 의미하지만, 그 개념과 역할에는 차이가 있다. 장자권은 주로 아버지의 유산과 물질적인 복을 의미한다. 장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다른 자녀들보다 두 배를 더 받는다. 그것을 요셉이 르우벤을 대신해서 받았다.
이로 인하여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레위와 요셉을 대신하여 열 두 지파 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땅을 배분 받는다. 실질적으로 요셉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배를 받은 셈이다. 또한 요셉은 르우벤을 대신하여 가문을 지키는 책임을 끝까지 완수한다. 물리적으로 형제들을 돌본다. 그래서 장자권이 요셉에게 간 것이다.
● 유다
유다는 ‘왕권’을 받게 될 것을 예언 받는다. 10절의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는 구절이 바로 대표적인 그가 왕권을 받을 것에 대한 예언이다.
여기서 ‘규’는 왕권을 상징하는 막대기이다. 그러니까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 통치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에게서 왕이 탄생한다는 말이고, ‘실로’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또한 ‘모든 백성이 복종한다’는 것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에게서 나옴을 의미한다. 유다는 죄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서 나오는가.
어차피 장자권이 요셉에게로 갔으니 그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오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권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요셉을 통하여 탄생하지 않았다. 유다에게서 태어났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돌아가시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가 바로 죄인이어야 한다. 그가 인간이 되고, 죄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죄인의 족보를 통해서 태어나고, 인간의 죄를 다 짊어진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죄인인 유다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다.(롬5:8) 이것이 바로 ‘유다에게서 한 왕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고, 십자가가 바로 그 예언의 성취이다.
야곱의 열 두 자녀에게 한 이 예언적 축복은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복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한 복을 부어주고 계신다. 그것이 우리가 복은 가장 큰 복이고, 십자가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의 모습은 무엇인가.
3.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누리는 것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4. 내 자녀가 문제의 세 아들과 같이 내게 행한다면 나는 그들을 어떻게 할 것 같은가.
5. 내게 만일 큰 재물이 들어온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것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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