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주후 90~100년에 기록됐다. 공관복음서와 바울 서신이 작성된 지 이미 20여년이 흐른 후였다. 다른 복음서들은 사건 중심이라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당시에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신학적 질문들이 있었다. 특별히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한 영지주의가 초대 교회를 위협했다. 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기 위한 목적이 담긴 책이다.
● 저자 및 기록 목적
이 책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저자는 이 책이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소개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에 있다.(요20:31) 이에 대한 예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이다. 이 표적은 마지막에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는 것으로 죽음 곧, 사망을 이기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가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 말씀의 의미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한다.(1절)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태초’라는 말로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이 있다.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이다.
그러나 요한이 말한 ‘태초’와 창세기의 ‘태초’는 다르다. 창세기의 태초는 분명한 시작점이 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한 태초는 시작점이 없다.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태초이다. 즉, 예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의미한다.
1절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한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것은 첫 번째 등장하는 하나님에게는 정관사 the(그)가 있다. 두 번째 하나님에는 없다.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세분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왜냐하면, 여기서의 ‘하나’는 숫자적 의미의 하나가 아니다. 유일하다는 의미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하나님은 실제 여호와 하나님 하나다. 이것을 근거로 1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태초에 예수님이 계셨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 요한은 첫 절부터 그가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말이 교회를 위협할 때였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이 탄생한 기사를 아예 빼버렸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후에 바로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라고 얘기하며 그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그럼, 왜 요한은 ‘태초에 예수가 계셨다’라고 말을 하지 않고, ‘말씀’이 있었다고 말을 하는가. 이 단어를 사용함은 요한의 계획된 의도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헬라 문화와 유대 문화를 다 끌어안을 수 있었다.
1) 헬라 문화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이들의 철학 용어에는 ‘로고스’라는 단어가 있다. 이 로고스는 우주의 이성이자,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원리, 논리와 법칙이다. 이들은 어떤 영적인 질서가 로고스가 계시한 것으로 지식을 얻게 되고, 그 지식이 인간의 영혼을 구제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한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이다’라고 말을 하는데, 여기에 쓰인 ‘말씀’이 바로 헬라어 ‘로고스’이다. 그러니까 요한은 헬라 철학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평소에 로고스가 계시의 수단이고, 구원의 방법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로고스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의 구원의 수단이었기에 너무 쉽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 것이다.
헬라 철학의 대표 사상은 ‘이원론’이다. 이것은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믿는 사상이다. 이들은 지식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믿는 영지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육체가 악하다고 믿고 있는데 요한은 이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왔다고 말한다.(14절) 이것은 이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들이 하찮게 여기고 악하게 여기는 육체가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말씀이었다.
2) 유대 문화
유대인은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함을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뜻은 그들에게 그는 창조주의 능력을 갖고 있는 분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율법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데 예수님이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요한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라는 문장하나로, 헬라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과 유대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가 하나님이요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쉽게 전한 것이다.
● 빛의 의미
요한은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하며 ‘빛이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한다. 빛은 무슨 의미인가. 빛의 의미와 역할은 창세기에 잘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했을 때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어둠이 물러가고, 식물이 소생케 됐다. 이것이 빛의 의미이다.
예수님이 빛이라는 뜻은, 그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모든 악한 영들이 물러가게 될 것이고,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소생케 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 예수가 우리의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분 만이 내 안의 어둠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분 만이 죽었던 내 영혼, 말라비틀어진 내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는 말의 원어의 뜻은, ‘이기지 못한다(헬.카탈람바노)’는 말이다. 그렇다. 예수님이 곧 빛이시다. 그 분이 우리 안에 찾아오면 우리 내면의 모든 어두움은 물러가게 된다. 그 분이 나를 지배하면 결코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해서 빛을 만들려고 하지 말라. 그저 그 빛 되신 주님께 집중하라. 그가 나의 행복과 만족의 원인이 되도록 그 분께 집중하라. 그 때에 비로소 주께서 이루신 ‘어둠을 물리친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도 모르게 내가 붙잡고 있는 미신적인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3. 사순절을 비롯한 절기 때에 주로 하는 육체적 고행(e.g:금식,철야,금욕 etc...)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필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말해보라.
4.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인가.(하기 싫어도 하게 만드는 힘) 그것과 신앙생활을 견주어 보면 내게 어떤 신앙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가.
5. 내가 가장 절망스럽고 어둠 가운데 있을 때에 내게 힘을 주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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