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부분에서 다른 복음서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요한복음에는 고난 받는 내용은 있는데 감정적인 부분이 빠져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불쌍하거나 처절해 보이거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일으킬 만한 내용이 없다.
예를 들면, 겟세마네 동산의 애절한 기도, 골고다에서 쓰러지셔서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내용, 십자가 상에서의 절규 등을 삭제했다.
반대로, 예수님이 고난의 상황 앞에서 흔들림 없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잡으러 온 군대 앞에서 먼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에 그들이 땅에 엎어지는 장면,(6절) 자신을 치는 하속인을 꾸짖는 모습,(23절) 빌라도에게 당당히 ‘내가 왕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다.(37절) 요한은 똑같은 사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정적으로 애달프고 가슴 아프게 흐르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다.
왜 요한은 이렇게 기록을 한 것인가.
● 요한의 의도
그것은 이 십자가는 불쌍하거나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부터 이미 계획된 일이었고, 하나님의 의도였으며,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행한 일이라는 것을 요한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고난주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고 고통을 묵상하는 수준에 머무르면 안 된다. 오히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구원에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고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루고자 하시는 그 하나님의 열심을 묵상해야만 한다.
내가 얻은 구원은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권의 하나님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향한 그 분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하고,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 그것이 고난주간이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본다. 기독교 신앙의 대표적인 경건을 말하라고 하면 ‘기도’와 ‘말씀 묵상’이다.
이 두 가지는 아무리 지나치게 강조하여도 부족할 만큼 기독교 신앙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이 두 가지를 강조한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그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이 두 가지에 집중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 변화가 없다. 왜 그런 것인가.
이것은 신앙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이 기도와 말씀 묵상이 ‘내 감정에 대한 만족’에 충실했지,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없다. 이로 말미암아 빚어진 결과이다.
기도를 하면서 오늘의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과 내가 주께 겸손한 자세로 나아간다는 태도만 있지,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생각도 없고, 이 기도를 통하여 신자로써 이 땅을 살아가야 할 마땅한 본분과 힘을 갖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성경 읽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많은 경우에 내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었는가에 집중한다. 또한 내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무엇을 깨달은 것에 대한 감동과 감격을 추구한다. 그것으로 스스로 경건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건은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와 말씀을 읽을수록 평안과 감격을 지나서 자꾸 내 안에 불편한 일이 있어야 한다. 자꾸 내게 변화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귀가 따갑게 들려서 힘들어야 한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자꾸 나를 몰아가는 것을 느끼고, 그 말씀이 가라고 하는 곳에 가고, 서라는 곳에 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경건이요.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신자의 삶이다. 대표적으로 요한을 말할 수 있다.
● 요한의 변화
요한은 자신이 쓴 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을 써 내려 갈 때에, 그가 약하고, 불쌍한 부분은 몽땅 뺐다. 그리고 오히려 그를 권세자요, 이 땅을 주관하시고, 주도적으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했다.
반면에 이와 반대로 제자들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그들의 잘남과 위대함과 능력으로 행한 일들은 죄다 감추고 있다. 그리고 아주 형편없는 인간으로까지 묘사한다.
예를 들어 본다. 예수님이 군병에게 잡혀간 이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 그 뒤로 닭이 울고 베드로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눅22:61,62) 이를 두고 ‘베드로의 회개’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 때 회개하지 않았다. 그냥 운 것뿐이다. 회개는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다. 그러나 그는 그냥 울었다. 그리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반성도 아니고 회개도 아니었다. 그냥 감정에 복 받쳤을 뿐이다.
아마 요한도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책에서 베드로가 울었다는 기록을 뺐다.(27절)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 때의 베드로는 회개한 것도 아닐 뿐 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이유가 그의 회개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점이 베드로에게 맞춰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요한은 베드로 뿐 만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실수한 모습과 바보스러운 모습을 많이 강조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혹시라도 사람들이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뽑은 이유가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있는 것으로 오해할까봐다. 그래서 그러한 부분은 완전히 삭제하고, 빼 버리고, 오히려 바보스럽고 쪼다스럽기한 모습으로 제자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어떠했는가.
그는 예수를 믿었던 초반의 모습은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막3:17) 무지 급한 성격에 화를 잘 못 참았다. 그러나 후에는 ‘사랑의 사도’라 불림을 받는다. 이것은 그가 한 일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빚어서 이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렇기에 차마 자신의 책에서 사람의 가능성과 위대함을 기록할 수가 없던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에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내가 그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에 차이가 없다. 오로지 십자가, 그 분의 은혜만이 의미가 있다. 그것을 요한은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평소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들었는가.
3. 나는 기도와 말씀 묵상(읽기)를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였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4. 내가 참으로 죄인이라고 깨달은 경험이 있는가. 언제였으며, 그 후로 어떻게 달라졌는가.
5. 제자들의 바보스러운 모습을 통하여 내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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