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회는 현대의 문제 있는 교회의 표본이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 교회를 어떻게 교훈하시는가. 먼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뭐라고 부르는가. 그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한다.(2절)
● 하나님의 교회
우리는 ‘교회’라고하면 당연히 ‘하나님’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울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단어였다. 교회의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이다. 이 단어의 뜻은 ‘어느 한 집단에서 누군가를 밖으로 불러낸 것’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가 여러 나라들을 정복한 후에,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할 때에는 ‘민회’를 소집했다. 이 민회에는 그리스 시민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때의 민회가 ‘에클레시아’이다.
이 단어의 개념이 로마 제국 시기에 와서는 민회 뿐 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모임이나 집회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 공동의 목적으로 사회적 활동을 하면 ‘에클레시아’였다.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군사적, 철학적 모임 및 상인 조합도 모두 ‘에클레시아’였다.
이러한 다양한 목적을 가진 모임이란 뜻의 ‘에클레시아’를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라는 개념으로 처음 사용한 분이 예수님이었다.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고 할 때의 교회가 바로 ‘에클레시아’이다.
그런 의미로 사도 바울이 이런 사회적 모임과 신자들의 모임을 구분하기 위하여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말은 곧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낸 사람들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세속적인 모임과는 다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은 현대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교회는 사회 모임과 다르다. 교회는 복음으로 모여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된 모임이다. 그렇기에 언제, 어느 때이든지 신자가 모이는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일하심이 선포돼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지중에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단지 사교적 모임을 의미하는 헬라의 ‘에클레시아’가 될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가 하나님께 책망 받을 일이 없게끔 하는 어떠한 도구로 사용될 것으로 말하고 있다.(8절)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우리가 지은 죄를 씻는 도구나 방법이 아니다. 죄인인 우리를, 우리의 삶 속에서 깨끗한 자, 거룩한 자로 만들기 위하여 동원된 수단이다.
예를 들어본다. 누군가 넘어져서 무릎에 상처가 나면 의사에게 간다. 그 의사는 상처를 꿰매고 낫게 하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의사가 내 아버지이면 어떻게 할까. 단순히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상처로 인하여 일상이 불편하지 않도록 일어서고, 걷고, 뛰는 것을 목표로 목숨 걸고 상처를 치료할 것이다.
바로 이 얘기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상처를 낫게 하는 도구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찢어진 상처가 아무는 것을 넘어서, 다쳐서 피 흘리던 자가 삶에 전혀 불편한 것이 없도록 방향성을 가지고 우리를 만지는 하나의 역동적인 능력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죄를 없애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죄를 없애고 이제 의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우리의 인생에 작업을 시작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목적과 목표가 있다. 그 은혜는 죄 용서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지는 의와 진리와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 분과 동행하는 자리까지, 더 온전한 인격과 신앙의 성숙과 성장이 있는 자리까지 가게 하는 것이다.
은혜는 율법과 상반되지 않는다. 은혜라는 말의 이면에는 율법이 요구가 신자의 방향성으로 제시가 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성경은 아주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이 율법이 가리키는 거룩한 방향으로 신자를 끌고 갈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은혜이다.(빌2:13,엡2:10) 그런데 우리는 왜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가.
● 좌절의 이유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세운 인생의 목표가 성경이 신자에게 목표로 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풍족히 준다고 한 약속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거리가 멀다. 모든 언변(로고스), 지식, 은사이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 우리에게 풍족해 짐을 의미한다.(5절)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5절) 즉, 신자의 문제는 ‘그의 안’에 있지 않음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실천적 차원에서의 실패이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내 인생 속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가치관, 인생관, 인생의 목표가 내가 추구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자가 가진 딜레마이고 성경의 말하는 진리와 전혀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이다.
이것을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을 심하게 공격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은혜와 평강’을 구하고,(3절)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4절)
그렇다. 신자의 삶이 이런 거룩과 생명에 이르는 것으로 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에 기초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두지 않는다면 우리처럼 비참한 인생도 없다. 하지만 스데반을 보라. 그가 죽음의 순간에도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던 것은 그의 죽음이 실패나 좌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순간이기에 기쁨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인생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 우리를 끌고 가시는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인생이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관계의 끈끈함, 따뜻함과 교회의 상관관계를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로 나누어 보라.(정답이 없음)
3. 만일 율법이 없다면 내 신앙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가.
4. 내가 복음(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고, 최소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5. 설교의 예로 등장하는 1번 세상의 것과 2번 영적인 것 중에 나는 무엇을 구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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