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이 여러 명이 있었다. 그들 모두 ‘안나스’라는 사람의 아들 혹은 사위였다. 즉, 대제사장의 실세는 ‘안나스’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에 의하여 체포당하신 예수님은 안나스에게로 끌려가 심문을 당했고 안나스와 몇몇의 공회원들은 모여서 예수님을 사형으로 정죄한다.(막14:64)
요한은 이 대제사장이 심문한 이야기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이야기와 병행하여 썼다. 다른 복음에서는 이 두 이야기를 완전히 구분하여 쓴 것에 반하여 요한은 교차하여 기록했다. 왜 그랬는가. 그의 의도가 너무나 분명하다. 이 두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지만, 전혀 예수를 못 알아보고 못 박은 대제사장과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사랑을 고백하고 죽기까지 충성을 맹세한 베드로의 이야기가 똑같다는 것이다. 둘 다 그리스도인 주님을 앞에 두고 그를 등지고 있다. 이 장면이 바로 요한이 하고 싶은 얘기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을 시작하며 언급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이다.(요1:5)
우리 인간 모두에게는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요한복음 내내 이 얘기를 하고 있다. 원래부터 인간은 선과 의를 못 알아본다. 내가 게으르고, 무지하고,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 인간은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 베드로의 이야기
베드로는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성품을 알고 보면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 나는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대제사장의 뜰까지 몰래 쫓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어떠한가. 그 진심을 지킬 힘이 없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사실 당시의 상황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이렇게 부인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저 예수 집단의 우두머리인 예수님만을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 예수님만 치면 모두 다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모두가 다 도망갔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도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여러 증거가 많지만, 결정적으로는 요한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로 공개된 인물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밑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체포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왜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한 것일까. 이 문제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바울이다.
바울은 분명히 예수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실제 순교도 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보며 깜짝 놀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신이 죄를 이길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고백을 살펴본다.
● 바울의 고백
바울은 로마서 7장 14절에서 8장 2절을 통하여 이런 고백을 했다. ‘우리는 죄 아래 팔렸기에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죄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선을 행하고자 하여도 결국에는 죄를 짓는 모습을 보고 그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이다.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이 짓는 죄를 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다. 바울은 내 몸이 내게 있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히 내 안에 다른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냉철하게 분석한 것이다.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이것을 이겨내려고 해도 죄가 자꾸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본다.
바울이 말한 이 모습이 바로 베드로의 상태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서 죽고 싶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주를 따라야 할 상황이 오자, ‘나는 예수를 모르오’라고 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 속사람의 소원과는 다른 일을 행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평가를 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최후는 어떠한가. 그것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한탄이다. 이것이 신자에게서 나오는 통한의 고백이다. 이 고백이 있는 자가 신자이다.
성경은 예수가 싫어서 못 박은 사람이나, 좋다고 고백한 사람이나 둘 다 똑같음을 계속 지적해낸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이런 것을 통하여 내가 나를 주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다음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다.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아는 자는 시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한다. 그를 향할 때에 비로소 알게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그분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는 것을.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고, 이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우리에게 주시며 ‘네가 스스로 이 죄악을 이겨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를 받아 줄 수 없고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치고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깨부수고, 그 속에서 나를 건져내신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요한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베드로를 겹쳐서 그렸다. 그 이유는 이 둘을 꾸짖거나 한심하다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권세를 깨기 전에는 모두가 죄의 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더 이상 우리는 사망으로 갈 수 없는 운명에 놓인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예수님은 잡으러 온 군인이 일개 보병 중대(약 600명)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는가.
3. 자신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죄와 가까워지는가. 멀어지는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4. 죄의 유혹이 올 때에 가끔이라도 이길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있는가.
5. 나에게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고백이 있는가. 있든 없든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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