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말하는 복과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복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그 차이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 ‘ 다 이루었다’라는 말의 의미로 살펴본다.
● ‘다 이루었다’의 의미
1) 예언된 말씀의 성취: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한 모든 말씀을 다 성취했다는 뜻이다.
2) 대속의 제사를 완성: 구약 시대에는 자신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1년에 한 번씩 짐승을 잡아서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 짐승은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그런데 그 본체인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더 이상 짐승을 바치는 제사가 필요 없어졌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원어를 보면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다 이루었다’는 말이 ‘수동태’이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길이 수동적이지 않았다. 상당히 능동적이었다.
본인을 잡으러 군대가 왔을 때도 스스로 자신을 드러냈으며, 빌라도로부터 사형을 면할 많은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죽음의 길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예수님이 머리를 숙이시니 그 후에 영혼이 떠났다.(30절)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조차도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행했음을 말한다.
이토록 적극적으로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수동태로 하셨다.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이 모든 것은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동의와 결단을 필요로 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그 분의 의지로 우리의 구원해 내셨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달고서라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소유한 복음이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있다. 그것은 회개를 구원의 조건으로 알고 있는 경우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본문도 그것을 말해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했을 때는 제자들이 통회 자복하여 회개하고 돌아온 상태가 아니다. 다 도망갔을 때이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서 선포하셨다. ‘너희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그리고 후에 그들을 주 앞에 돌아 온 것도 본인 스스로 깨달아서가 아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모인 곳의 문을 꼭 닫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이 갑자기 그 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서 회개시킨 것이다.(요20:19)
우리는 회개해서 구원을 얻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근거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회개케 하시고, 우리를 믿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우리의 회개와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마땅한 결과이다.
● 마리아를 강조한 이유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는 3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이들의 이름이 모두 마리아이다.(25절) 왜 요한은 이토록 마리아의 이름을 강조했는가. 그 답은 ‘마리아’ 단어의 어원을 보면 알 수 있다. 마리아는 구약의 ‘마라’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 사흘 길을 갔을 때에 물을 발견한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 물을 먹었는데, 쓴 물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마라(쓰다, 고통)’라고 했다. 이 때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모세가 한 나무 조각을 던졌더니 물이 달게 변했다. 못 먹는 물, 가치 없는 고통의 쓴 물 가운데에 던져진 나무로 인한 변화였다.(출15장) 이 나무는 무엇의 그림자인가. 그것은 십자가이다.
지금 이 모습이 마라, 즉 마리아가 모여 있는 가운데 던져진 십자가의 모습이다. 그 고통이, 쓴 물 인생의 마리아가 이 십자가로 인하여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됨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마라의 쓴 물 사건’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던 고통 받는 자에게 흑암이 없어지고, 빛이 비춰지는데 이 일을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성취이다.(사9:1,2,7)
여기서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다.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복을 주셨다고 하셨는데 신자들의 상황과 형편에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복을 실감할 수 없다. 왜 그런가.
● 하나님이 주신 복
그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라는 말을 이해하면 우리의 복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하박국서를 보면 첫 시작부터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크게 항변한다. 그 이유는 세상에 많은 불의, 죄악, 파괴와 폭력이 있고, 정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한 울분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답변을 주신다. 그런데 뜻밖에 그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 그에게 한 말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이다. 이 때 하나님이 한 이 말은 영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아무리 불의하고, 어둡고, 황망할지라도 신자는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의 핵심은 보이는 것으로 영향 받지 않는 것이다. 신자는 환경이 나아지는 것으로 행복, 보람, 기쁨을 느끼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이끄신다는 믿음이 바로 서 있으면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산이 요동하고, 바다가 내게 덮쳐 올지라도 주 안에서 누리는 평강과 평안 이것이 우리가 소유한 복이고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능력이다.
복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그것은 진리와 생명과 영원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과 다른 종교의 복과 다른 점이다. 이는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선포로 이루어진 신자의 신분과 약속된 권리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무속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행하는 신앙의 형태는 무엇이 있는가.
3. 파묘와 같은 무속 신앙의 영화를 볼 때 내가 받는 영향은 어떤 것이 있나.
4. 나는 언제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혹은 아직 믿음이 약하거나 없다면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5. 예수를 믿은 후 내가 실제적으로 느끼는 큰 복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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