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상황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예수님을 세마포로 싸서 새 무덤에 안치한다.(요19:40) 그 후에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에 와 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이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다. 이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무덤에 와 보니 무덤이 비어 있었다.
그 때 무덤 안의 상황은 이러했다. ‘세마포가 놓였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있었다’ 그러니까 세마포와 수건이 예수님을 쌌던 모양 그대로 남아 있고, 예수님의 몸만 바람처럼 쏙 빠져 나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체를 누군가가 훔쳐가거나,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일어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마태복음에 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얘기한 것이다.(마28:6) 이 신비한 상황을 보면 그가 부활했음을 알게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이것을 을 보고 ‘믿었다’고 말을 한다.(8절) 그들은 뭘 믿은 것일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믿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생전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수차례 말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현 상황과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9절)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이다.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그녀에게 천사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 때 그녀의 대답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에 운다’고 했다(13절) 그녀도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부활로 여겼다면 울지 않고 환호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 베드로, 요한, 마리아 다 똑같다. 그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경청하였고 실제로 그 말을 다 믿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그들의 변화를 만들지는 못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의 동생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에게 ‘주를 믿으면 죽어도 살 것을 믿는다’(요11:26)고 해 놓고, 무덤을 옮기라고 했더니 ‘죽어서 냄새가 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대답했다.(요11:39)
마르다와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를 믿는 마음 역시 거짓이 없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 믿음과 내 행동이 따로 간다.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지금 하는 행동이 믿음이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믿는 사람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전혀 변화가 없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못 만났기 때문이거나 혹은 삶 속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 삶에 매일 같이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 심지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성경이 하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제자들은 변했다. 숨어 있던 자들이 모두 다 순교를 했다. 그럼 그 변화는 언제 일어났는가. 많은 경우에 제자들이 변화된 시기를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이후에 변했다고 생각한다. 시기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한두 번 나타났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총 11번을 나타나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변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이전에 버렸던 그물과 배를 다시 취하여 고기를 잡으러 갔었다. 이 때 이미 그들은 예수님을 숨어있던 방에서 만난 이후이고 도마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까지 했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슴은 뜨겁지 않았다.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다.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가진 신앙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어도,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언제 변했는가. 성령이 이 땅에 오신 이후이다(행2장). 성령 강림 때에 베드로는 비로소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하나님의 계획임을 깨닫는다.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그가 오심, 죽으심, 부활하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모여 한 방향으로 가야할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사명은 바로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증인으로 불렀다’는 것이다.(행2:32)
그것을 깨닫게 된 후에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외친다.(행2:40) 물론, 그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2명씩 파송할 때에 ‘회개’를 전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기계적으로 예수님이 시키신 일을 행했다. 하지만 이 깨달음 이 후에는 틈만 나면 회개하라는 말을 전한다. 이게 그들에게 나타난 큰 차이이다.
이전의 신앙은 자기의 번영과 안식과 평안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후에 깨닫고 보니 신자는 이 짧은 이 땅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뜻. 즉, 영원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후에 이들의 삶이 변했다.
●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마라’고 하셨다.(17절) 이것은 물리적으로 만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너희들이 갖고 있던 ‘주님에 대한 생각, 바람, 기대’로 나를 잡지 마라는 것이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제 부활 전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 후의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 그 분을 보는 관점, 신앙의 관념, 그분을 향한 바람과 기대가 달라야 한다. 그 때 우리는 ‘잠시’가 아닌 ‘영원’을 보게 될 것이며, 우리의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부활하신 이유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신앙이 생긴 이 후에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그 변화가 생긴 계기 혹은 이유는?
3.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믿음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는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4.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5.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는 말을 들을 때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나는 왜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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