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제자들에게 한 유대인이 접근해서 ‘정결예식(침례)’에 대하여 논쟁을 했다. 그 후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예수가 침례를 주는데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간다고 전하였다. 유대인이 전해 준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우리 신자가 걸어가는 인생 속에도 비슷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나의 믿음이 흔들리는 일들을 만나면 신자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 때 우리가 붙잡아야 할 믿음의 진수는 무엇인가.
● 하나님의 주권을 보라
이 제자들의 말에 요한은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라고 답을 하였다.(27절) 즉, 시기와 질투로 맘이 편치 않은 제자들에게 인간사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한 것이다. 오히려 ‘너희들이 주목할 그리스도는 내가 아니라 그이다’고 하며 이제부터 이 일을 너희가 증언해야 한다고 하였다.(28절)
성경에는 이와 같이 화가 나기에 충분한 상황이지만 자신이 가진 힘을 쓰지 않고 하나님께 이 상황을 전적으로 맡긴 인문들이 있다. 요셉이 그러했다.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에게 찾아와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50:19)라는 말로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만들었다.
다윗 역시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엔게디 동굴에서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여 행하실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삼살24:12) 요셉과 다윗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만이 가능한 행동이었다.
● 요한의 고별사의 의미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상식을 뒤 엎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장 상식적으로 접근해 본다. 신자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것은 나의 성공이다. 내가 최고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이 역시 잘못된 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은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이 진수(essence)는 아니라는 것이다. 진수는 내가 쇠하는 것이다. 작아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자의 삶의 진수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본다. 기독교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은 우리 신자가 행하는 의와 거룩이다. 많은 경우에 내가 쇠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것을 택한다. 내가 갖고 있는 성공한 위치에서 그것들을 내려놓고, 가장 험하고 거친 곳으로 가는 것을 택한다. 그래서 그 낮은 곳에서 그들을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다.
물론이다. 그것 역시 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쓰임을 받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수는 아닐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것이 기독교의 가치를 훼손시키기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이 때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묻히게 하는 것으로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슈바이처를 말할 수 있다. 그는 아프리카의 아버지로 불리며 흑인들을 위하여 헌신했다. 지극히 존경 받고 사랑 받기에 합당하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이었다고 하기에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를 생각하면 예수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수고와 헌신이 앞서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의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정당하고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단지 위대한 휴머니스트와 박애주의자이지, 기독교 신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없다.
반면에 바울, 베드로 그리고 스데반은 다르다. 우리는 이들의 신앙의 행보에 큰 감동을 받고 이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이들의 이미지에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만이 해석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 만을 위하여 달려간 삶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의 죽음’이다. 이들 모두 죽음 앞에서 아주 당당했고, 이해할 수 없는 평강 가운데 눈을 감았다. 바울은 ‘죽음 후에 의의 면류관’이 있음을 말하였고,(딤후4:8) 베드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청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으며,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이 찾아옴을 느끼자 자기를 해하는 모든 사람을 축복하고 중보하며 눈을 감았다.(행7:60)
이것이 바로 침례요한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다. 기독교의 진수는 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죽음을 기대하는 자이고,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일 때에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신자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하나님께 올리는 영광이다.
요한은 자신이 쇠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흥하는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그 말한 그대로 그렇게 이 제자들과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심지어 그의 죽음은 위대해 보이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후대의 신자들이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쇠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자가 보일 수 있는 신앙의 진수이다.
이것은 꼭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모두 성경의 위인들을 본 받아 모두가 순교하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죽음은 단지 우리 인생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의 예이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 보일 수 있는 신앙의 진수는 죽음과도 같은 아주 심각한 파멸의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평안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내게 일어나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벌어지는 일임을 기억하며 그 분께 나의 생애를 담담히 맡기는 것. 이 일을 통하여 신자의 진수가 드러내가 될 것이고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요셉이나 다윗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3. 내 인생에 가장 두려웠던 일은 무엇이었나?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4. 내 인생 신앙의 시작부터 이 신앙의 진수를 밝히 알았다면 무엇이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5. 나를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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