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가진 신자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 단어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평강’이다.
● 평강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든 문을 닫아걸고 근심과 걱정 가운데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19절)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말씀하시고, 8일 후에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같은 말씀을 또 하셨다.(26절)
이 선언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다. 왜냐하면 이 제자들은 이 평강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들은 예수님을 배반한 자들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을 후회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들을 닫아걸고 숨어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문을 뚫고 들어오신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제자들에게 ‘평강’을 전한다.
이 예수님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과 정면 대치가 된다. 그 구절에서는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고, 문 안에 있는 자가 문을 열어야 예수님이 들어오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구절은 전도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불신자들에게 ‘네가 마음 문을 열어야 주님께서 찾아오실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구원의 열쇠를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이 구절은 불신자들을 믿게 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며 열 것을 요구하는 그 대상이 불신자가 아니다. 그 대상은 교회이다.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를 믿는 자의 모임”이다. 즉, 이미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 바로 앞의 구절을 보면 아주 분명하다. 예수님은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한다’(계3:19)고 말하고 있다. 이미 사랑하는 자이다. 모르는 자도 아니고, 관심이 없는 자도 아니며 불신자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하기에 책망을 하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이다. 무엇을 책망하는가. 신앙의 열심을 내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었다.(계3:19)
왜 그렇게 하셨는가.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이 미지근한 교회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이미 신자인 이들로 하여금 다시금 열심을 내야함을 책망하며 회개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택하신다. 그리고 믿음도 주신다. 하지만, 회개는 믿음의 당사자가 해야 한다. 그렇기에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아침에 등교시키기 위하여 방문을 두드리며 깨우는 엄마의 모습과 흡사하다. 엄마가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자녀삼기 위함이 아니다. 자녀이기에 깨우는 것이다. 하지만 일어나는 것은 자녀 본인이 해야 한다.
계시록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의 모습은 자녀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이미 구원 받은 자에게 무어가 촉구하는 예수님의 모습. 결국에는 회개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이 정확히 그 얘기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간 제자들을 찾아오셨다. 찾아가서 회개시켰다. 그들을 돌이켰다. 이 때 닫혀있는 문이, 그들을 돌이키는 것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요. 우리가 이 땅에서 취하게 될 능력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평강을 전하며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22절) 이 ‘숨을 내쉬며’라는 단어 ‘엠퓌사오’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이다.
● ‘숨을 내쉬며’의 의미
이것과 똑같은 단어(엠퓌시오)가 구약에 두 번 등장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흙이었던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실 때’(창2:7)이고, 다른 하나는 에스겔의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실 때’(겔37:9)이다. 이 두 상황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생명이 없었거나, 이전에 소유했던 생명을 잃어 버렸던 자들에게 생명이 부어지는 경우에 사용됐다.
본문의 제자들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생명이 없이 덩그러니 누워있는 흙덩이 아담과 동일하다. 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셔서 살리는 장면이 바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숨을 내쉬는’ 모습이다. 이 숨으로 인하여 죽었던 영이 살아난다.(고전15:45)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이 주는 공포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다. 그 공포 아래 있으면 평안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이 지속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맞이하게 될 최악의 상황인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찾아와 숨을 내쉬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평강의 히브리어는 ‘샬롬’이다. 이 샬롬의 어원은 ‘솨람’이다. 이 단어의 뜻은 ‘배상하다(갚다)’라는 뜻(출21:36)과 ‘마쳤다. 완성했다’라는 뜻이 있다.(왕상9:25)
그렇다. 이 거친 세상 속에서 우리가 평안에 거할 수 있는 이유는 더 이상 우리가 만나는 모든 악한 일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치러야 할 것들을 이미 주가 갚았고, 주께서 내 인생을 붙들고 끌어서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상이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에 흔들릴 필요도 없고, 좌절할 이유도 없다. 그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강’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아주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평안을 경험한 일이 있었는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누어 보라
3. 구원이 전적으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경험한 일이 있었는가.
4. 내가 진심으로 회개한 적이 있는가. 어떤 부분이었고, 어떤 상황이었는가
5. 나는 ‘죽음’을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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