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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Soo Yong Lee

5.28.2023. 요한복음 강해(10):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다(1) 요4:1~15절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앞서 침례 요한의 때 보다 더하였다. 그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그 자리, 유대 땅을 떠나 갈릴리로 이동하셨다.

왜 그렇게 행동한 것인가. 그것은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물리적인 왕을 원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이 나라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칫 잘못하면 대중들에게 이 인기가 하나님 나라 건설에 방해가 되고 혼선이 될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유대 땅을 떠나 갈릴리로 가신 것이다.(3절)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 나라를 큰 그림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 말들, 행동이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본능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정확한 지침과 교훈을 담은 것이 본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위로부터 갈릴리, 사마리아 그리고 유대 지역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남쪽 유대 땅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관통해야 했다. 그런데 모든 유대인들이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서 갈릴리로 올라갔다. 상당히 멀리 우회를 했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그것은 BC 722년 북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의 역사와 연관이 있다. 당시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함락시키면서 사마리아 땅에 상당히 많은 곳의 이방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을 혼혈인으로 만들어 그들의 종교성과 민족 정통성을 말살시켰다.

반면에 남유다 사람들은 70년간 바빌론 포로로 다녀 온 후에도 혈통과 종교적 전통을 잘 지켰다. 그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취급했다. 어느 정도였는가.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 건축을 할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이것을 거부했다. 성전을 개, 돼지들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이유였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을 때 부정한 시체를 갖다 놓거나 건축 재료를 훔쳐 가는 것으로 반목과 대립을 하였다. 즉, 당시의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들은 서로 원수처럼 지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인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에 발을 딛고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고 한 여인을 만나, 그녀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예수님과 여인이 대화를 나눈 곳이 ‘야곱의 우물’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아주 깊은 의미가 있는 곳이다.

● 야곱의 우물의 의미

이 우물이 있는 장소는 ‘수가’라는 동네로 이 땅은 구약 시대에는 ‘세겜’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 세겜은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하몰의 아들들에게 은 일백개를 주고 구입한 곳이다.(창33:19) 그런데 다른 곳을 보면 이 땅은 야곱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곳’이라고 한다.(창48:22)

이 말의 의미는, 실제로 야곱이 강도질을 해서 그들로부터 빼앗았다는 것이 아니다. 정당하게 샀으면서도 그것을 원수의 손에서 지켜내기 위하여 처절한 싸움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것이다.

지금 이 역사적 배경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앉으셨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며 그 여인을 회심시키셨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께서 값으로 사신 당신의 백성을 다시 되찾으시는 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결코 빼앗기지 않고 처절한 싸움을 하시며 되찾고 계심을 의미한다. 이를 위하여 일부로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로 찾아가시고, 그녀를 만나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이 과정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어떠한 헌신과 노력이 없다. 심지어 그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구원케 해달라는 간절함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준비하시고, 적극적으로 다가와 이루어내신 그의 구원의 열매인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비교이다.

● 니고데모 vs. 사마리아 여인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서로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니고데모는, 공의회 일원으로 아주 높은 사람이다.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바리새인이고 정통 유대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에 아주 완벽한 조건을 가졌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은 달랐다. 비천한 여인이고, 부도덕한 사람이었으며 이방인 취급을 받는 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니고데모는 예수를 찾아왔고,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가 찾아왔다. 결국 이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나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으로는 이 두 사람 간에 전혀 공통점이 없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을 연결선상에 놓아 비교하였다. 왜냐하면, 참으로 중요한 기독교의 본질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만약에 니고데모의 구원 받은 이야기만 기록하면 모든 사람은 오해할 수 있다. 저렇게 완벽하게 하나님을 섬기기에 노력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요한은 바로 이어서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을 기록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런 구원 받을 자격도, 조건도 없었고, 심지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의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않았던 사림이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께서 일부로 사마리아 땅을 뚫고 찾아 오셔서 그녀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완벽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얘기했다. 요한은 이것에 대한 완벽한 예시로, 구원 받을 만한 근거와 조건이 전혀 없는 사마리아 여인을 소개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야 말로 전적인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음을 잘 보여주는 실례이기 때문이다.

우물과 샘물은 사람의 갈증을 해소하는 면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우물은 사람이 파야 물을 먹을 수 있다. 샘물은 그렇지 않다. 샘물은 자연이 준 선물이다. 인간의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그것이 샘물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샘이 되어 샘물을 제공하신다. 그것이 바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 내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3.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은 어떤 것이었나.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작용을 했는가.

4.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무엇 때문에 믿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5. 내 주위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있는가. 그들은 왜 믿지 못하는 것 같은가. 그들을 믿게 할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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