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우에 십자가를 극단적인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적으로 이해한다. 십자가를 묵상하며 예수님이 받은 고통, 배신, 처절함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 이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반드시, 꼭 벌어졌어야만 하는 사건이고, 이 사건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 속에 사뭇 이상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으실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기회는 무엇인가.
1) 빌라도의 노력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적어도 6번의 노력을 했다. 적지 않은 수이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이 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빌라도가 채찍질을 한 것이다.(1절) 이것은 불법이다. 그런데 왜 때렸는가.
아마도 빌라도가 유대인을 설득하기 위하여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봐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기에 이렇게 심하게 때려서 풀어주려고 한 것이다.(4절) 유대인들에게 그 처참한 모습을 보여 주며 ‘이만큼 했으니 됐지 않느냐’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유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
2) 예수님의 의지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물으니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7절) 그 얘기를 들은 빌라도는 이번에는 예수님을 설득한다. 예수님에게로부터 ‘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을 유도해 내면 예수를 풀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예수님이 ‘그 권한은 하늘에 있다’고 대답하셨다.(11절) 그것은 본인 스스로가 십자가를 택했다는 것이다.
3) 유대인의 처형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 이유는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죽이고(행7장), 야고보를 칼로 죽인 일도 있었다.(행12:1) 자기들이 죽이면 된다. 그런데 왜 유독 예수는 빌라도에게 요구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은 돌이나 칼에 죽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죽는 것으로 예언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갈3:13)
성경의 예언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는데 나무에 달려 죽는다.(신21:23) 그런데 십자가 형벌은 유대법에는 없다. 로마법에 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풀려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회가 다 무산되고 모든 상황이 십자가를 향하여 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이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때는 율법을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냥 예수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기들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이고 싶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가.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악한 마음조차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요한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슬프거나, 애통스럽거나, 우리를 절망케 하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악, 간사함, 사악함과 무지가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하는 현장이다.
● 왕의 의미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왕’이라는 단어가 13번 등장한다. 그 중에 오늘 본문에만 7번이 나온다. 그 외에 간접적으로 묘사한 부분도 4번이 더 있다. 간접적인 묘사는 이러하다. 그것은 예수님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것이다.(2절) 자색 옷은 당시 로마 황제가 입던 색깔의 옷이었다. 그렇기에 가시관과 자색 옷은 왕관과 왕복을 의미한다.
또한 재판석에 ‘앉는다’는 말을 자동사, 타동사가 가능한 ‘카디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타동사일 경우 예수가 앉은 것으로 묘사가 가능하다. 예수님의 ‘하늘의 권세’라는 말도 그가 왕임을 의미한다.(11절)
심지어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명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고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한 것은 빌라도도 예수님이 왕임을 인정한 것이다.(22절) 요한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정말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을 빚어가지 않는다. 그 분의 의지로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가신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런 극단적 깨달음을 만든 계기가 바로 십자가이다. 그들의 인생은 십자가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그들의 설교에서 잘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스데반의 설교를 보자. 그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브라함, 요셉, 모세이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가나안 땅과 이집트를 오고 갔다. 요셉 역시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팔려갔으며, 모세 역시 이집트의 왕자의 자리에서 광야로 쫓겨났다.
그런데 이들의 결국은 어떠한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요셉은 자기 형제 12명을 거두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된다. 모세는 80이 넘은 나이에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다. 이 모든 일이 무엇을 말하는가. ‘너희의 인생은 너희 손에 있지 않다. 너희를 붙잡아 인도하는 자는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이 말이 곧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의 손에 잡힌바 된 것은 우리의 회개와 요청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가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이다.(사53:5) 그것이 곧, 십자가이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고통과 애절함이 아닌 우리의 감격이요 주께 드리는 찬양의 이유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십자가를 묵상할 때에 눈물을 흘린 일이 있는가. 그 눈물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3. 나의 고통과 절망의 순간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 때에 어떤 감정과 생각이 드는가. 부정적인 부분과 긍정적인 부분을 나누어 보라.
4. 예수님이 나의 왕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설교를 들은 후에 달라진 점은?
5. 내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현재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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