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오로지 단 하나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할 구세주,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요20:31) 그런 이유로 요한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는 사건’에 바로 이어서 이 ‘성전 정화 사건’을 기록하였다.
왜냐하면, ‘포도주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면,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이어서 설명하며 복음을 온전히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 ‘성전 정화 사건’이 부활을 의미하는가.
● 유대인의 유월절 : 요한은 이 사건의 도입을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얘기한다. 이 평범한 한 문장은 당시의 유월절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형식화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유월절을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언제나 ‘여호와의 유월절’ 혹은 ‘여호와를 위한 유월절’로 소개한다.
그러니까 모세가 유월절을 제정할 때는 분명히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절기로 제정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하나님이 중심이 아닌, 유대인들, 사람들을 위한 절기로 자리 잡았음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유월절이 무슨 날인가. 그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한 날이다. 이집트에 내려진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서 건진 날이다. 그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당시 유월절은 약 100만명의 사람들이 모였었다. 이 모인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갈 때에는 성전세를 내야했다. 당시의 공용 화폐는 로마 화폐이다. 그러나 이 화폐에는 가이사의 초상화가 있었고, 그 안에 ‘가이사는 주님이시다’라고 써 있었다. 그래서 로마 화폐 대신에 유대인의 화폐인 세겔로 바꿔주는 환전상이 있었다. 이 환전상은 산헤드린 공의원들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약 50%의 수수료를 떼었다.
또한 그 예루살렘 성전 주변에는 가축 농장 4곳이 있었다. 그리고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율법에 따라서 그곳에서 매입하도록 했고, 그곳에서 산 가축들을 주로 합당한 제물로 통과 시켰다. 이 농장 관리를 대제사장이 했기에 이 또한 매 제사 마다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이를 보고 예수님은 환전상의 상을 뒤엎고, 매매 상인들의 양과 소를 채찍으로 다 내 쫓았다. 왜 그랬는가. 이 절기가 여호와의 유월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유월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이 지금 그 썩어져 가는 종교 행사로 전략한 이 모습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부패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거나, 알더라도 이 성전 매매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를 하기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의 유월절이 유대인의 유월절로 되어가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어떤 것인가. 그것은 ‘주일’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를 하나님을 위한 날로 제정하여 예배했다. 그 때의 예배는 목숨을 내 놓고 드렸었다.
하지만 오늘 날에는 그렇지 않다. ‘교회를 위한 교회의 날’이 되어가고 있거나, ‘신자를 위한, 신자의 날’이 되어가고 있다. 예배 시간이 하나님에게 집중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만족을 채우고, 나를 위로하는 자리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교회 출석을 하지 않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인들을 교회에 나오게 하거나 변심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인들이 편안하게 예배하는 교회로 변해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무 자르듯이 정답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교회의 사이즈가 작아지더라도 본질을 지키는 것은 교회의 사활을 걸만큼 중요하다. 이렇게 본질에 타협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켜 주실 것이다.
● 성전의 상인을 쫓은 이유: 본문의 사건은 종종 ‘성전 정화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거나, 청결하게 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성전 척결 사건이라 함이 옳다. 정화는 깨끗케 하여 다시 사용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척결은 제거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척결이 맞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더 이상 이런 껍데기 예배는 이제 끝내야 된다고 선언하고 다 때려 부순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예수님이 지금 쫓아낸 것은 소, 양, 비둘기이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 제물이다. 이러한 제사 제물은 누구에 대한 모형인가. 그것은 이 땅에 오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다. 그런데 그 모형의 실체가 왔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실체가 온 이상 더 이상 모형에 집중하면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조금이라도 우리 신앙의 혼동을 자아낼 근거인 그 모형들을 깨부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체가 아닌 모형을 섬기면서도 내가 참 신자인지 아는 그릇된 신앙인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형식적 신앙에서 돌아서라는 것이 아니다.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그 본질의 회복의 길은 오직 하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다. 그 길만이 우리가 복음 안에 거하는 신자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정도(正道)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 기독교 신앙의 본질: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19절) 여기서의 성전은 헤롯 성전이 아닌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 그러면 내가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와 열심으로 복을 받으려는 것은 여전히 본체가 아닌 모형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행하여야지만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이 모든 것을 나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러 오셨고, 나를 위하여 이를 기꺼이 행하셨다. 그것을 믿는 것이 나의 복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본문의 사건은 종교적 형식을 버리는 것에 중심이 있지 않다. 형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성전을 척결하신 것이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가신 것이다.(17절) 이것을 믿고 바라보는 자가 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현대의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위한 것'에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자리 잡게 된 것은 무엇인가.
3. 내 안에 여전히 좇고 있는 양, 소, 비둘기는 무엇인가. 어떻게 내가 이것을 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4.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을 하려는 마음에 가장 어려움이 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5. 개인적으로 신앙의 어려운 마음이 들 때에 회복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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