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취급을 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달라하는 예수님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여기서 ‘어찌하여’의 원어의 의미는 ‘왜’가 아니다. ‘어떻게’이다. 이유가 아니라 방법을 묻는 것이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물을 주면 접촉은 불가피한데 물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 어찌하여 나에게
사마리아 여인의 이 태도는 정확히 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태도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마치 기계적으로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대해야(섬겨야) 복을 받을 것인가, 혹은 저주를 피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그 때 예수님은 복음에 대한 핵심적인 대답을 하셨다. 그것은 복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10절) 자녀의 생일 때 선물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녀가 태어나기 위하여 어떤 노력과 애를 쓴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잘 태어났다고 축하해주고 선물을 주는 것이다.
구원이 정확히 그 개념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보상이 아니다. 무언가를 해서 받으려는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 구하지 않는다. 왜 안 구하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복이 생명수(생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영혼의 갈등과 갈증을 채워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라는 것을 못 믿는 것이다. 그래서 구하지 않는다. 내 이성과 상식으로 하나님의 복을 제한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 방법을 물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내가 너에게 주겠다’고 하고 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일을 하시고, 나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이다. 구하는 자에게 조건 없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녀는 못 알아듣는다. 기존에 갖고 있던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은 ‘내가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복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 참된 예배 처소
이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했는데 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해야 한다고 말하느냐고 질문한다. 이 산은 사마리아 세겜 땅에 있는 그릿심산을 말한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다. 야곱도 이곳에서 첫 제단을 쌓았고, 야곱의 가족들과 요셉의 뼈도 이곳에 묻혔다. 또 모세가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장소로 선택한 곳도 그릿심산과 에발산이다. 여호수아가 전투를 이기고 단을 쌓은 곳도 에발산, 세겜 땅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단의 시초는 사마리아 세겜 땅이지만 실제적으로 성전을 지어서 예배한 곳은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사마리아 땅에서 예배하는 이유는 이전 여로보암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두고 예배한 것을 근거로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여인이 어디서 예배를 해야 내가 복(생명수)을 얻을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답을 하셨다.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다’(21절)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다.(24절) 그러니까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예배를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개역성경은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을 했다. 이로 인하여 많은 한국 신자들에게 혼동을 안겨줬다. 왜냐하면 ‘신령과 진정’이라고 하면 마치 ‘거룩한 모습과 진심이 있는 태도’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의 의미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말의 원어는 ‘프뉴마(영)’와 ‘알레데이아(진리)’이다. 프뉴마는 성령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예배하는 자가 성령으로 예배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과 동일하다.(빌3:3) 특별히 알레데이아(진리)는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경험에서 나온 진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뜻이 있다. 그것은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 밝히 드러남’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숨겨지고 감추어져 있던 본질, 그 실체가 이제 드러났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구약 때부터 흠 없는 짐승으로 예배했던 그 모형, 그림자의 본질인 본체가 왔음을 의미한다. 그 본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가 곧 진리이다.(히9:24)
그러니까 이제는 어떤 방법, 형식 또는 태도가 아닌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알레데이아)로 예배하라는 말이다. 이 예배에는 이 세 분의 하나님 중에 한 분이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배의 본질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내가 드리는 예배가 어떠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예배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 예수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예배이다. 무언가 내가 가진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 참된 예배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알 때에 우리 안에 눈 녹듯이 녹아지는 말할 수 없는 평안과 평강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나는 예배를 드릴 때에 ‘어떻게’에 집중하는가. 아니면 ‘무엇을’에 집중하는가
3. 내가 생각하는 예배의 정의를 말해보라. 그 정의와 오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떤 부분인가.
4. 내가 하나님께 잘 구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5. 내가 가장 깊이 있게 예배했던 순간과 오늘의 말씀을 비교해 보라. 잘한 점과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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