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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Soo Yong Lee

6.16.2024 요한복음 강해(50). 하나님의 부르심(God's Calling). 요21:15~25절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 메시지 중에 우리를 혼란케 하는 극단적인 두 가지의 메시지가 있다. 하나는, 십자가 복음은 없고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다분히 도덕적, 윤리적이며 내가 하나님께 헌신한 만큼 복을 받는다는 것이기에 모두가 공감을 한다.

     

다른 하나는 역으로 구원 받은 이후의 신자의 삶에 대한 지침이 없이, 십자가 구원만을 전한다. 이들은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구약의 율법을 가르치고 지킬 것을 얘기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것은 구약 시대의 것이기에 은혜를 모르는 자라고 얘기한다.

     

둘 다 바른 복음이 아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구분이 쉽다. 예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닌 율법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복을 받는다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두 번째 경우는 구분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전혀 틀림이 없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이들이 놓치는 사실이 있다. 우리의 구원은 영혼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땅의 삶을 과정에도 이루어지는 구원이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신자의 ‘수준의 변화’ 역시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다. 영혼의 구원(천국)은 예수를 믿는 순간 이루어진다(칭의). 여기에는 우리의 행위가 전혀 필요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것을 요구하신다(성화). 이 성화의 과정 속에 필요한 것이 율법이다.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신자의 삶의 방향을 알 수 있고, 자신의 신앙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율법이 인생의 가이드 북인 것이다.

     

본문에서 그것을 확인해 보자.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그의 사도의 신분을 회복시키셨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자신의 양을 맡겼다.(15절) 지금까지 예수님이 한 그 일을, 이제는 ‘네가 해야 한다’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고 있다.

     

이 날의 아침의 상황을 보면 더욱 명확하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을 위하여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다. 이것은 오병이어의 재현으로 본인이 이들을 구원한 생명의 떡임을(요6:35)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굳이 일부로 제자들에게 잡은 고기를 가지고 오라고 명하신다.(10절) 무슨 얘기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이다. 당신 혼자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 일에 참여하게 함으로 함께 완성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도 마찬가지다.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셨다. 하지만 ‘돌을 옮겨 놓는 일’은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자가 경험해야 할 일들을 남겨 놓으시고, 이 일을 통하여 신앙의 성숙을 이루고,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동역자로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시다.

     

그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더라도, 이에 순종할 능력도, 용기도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하나님께 사랑 받는 신자의 삶’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지의 곳에 가서 순교할 각오로 복음을 전하거나, 먹을 것, 입을 것, 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자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큰 일이다. 신자의 삶이란 각자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따뜻한 미소로 누군가의 하루의 피곤을 녹이는 것도 주 안에서 큰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리는 엄청난 희생을 해야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믿음이 약하거나, 재능이 부족하거나 잦은 실패와 실수를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은 이들 모두를 주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초대하고 있다.

     

본문의 베드로도 마찬가지이다. 왜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셨는가. 그것은 베드로에게 ‘넌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이다.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그것은 그를 옛 이름 ‘시몬’으로 부르는 것으로 그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 준다. 왜 과거의 이름으로 부르는가. 그것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3년이 지났어도 예수님이 지어준 반석(베드로)답게 살지 못하고 있음을 그에게 일러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이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하려고 했던 모든 일들을 실패하고 욕을 먹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함으로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고 하던 그 기백이 무너졌고, 예수님에게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는 말도 들었고, 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귀를 잘랐을 때도 한 소리 들었다. 심지어 본업으로 돌아와 고기를 낚으려고 했는데, 그마저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정말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바로 그 때에, 즉, 베드로(반석)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과거의 시몬의 모습일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같이 가자고 하신다. 그렇다. 신자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나에게 띠를 띄우고 가자고 할 때에 그 걸음에 순종하면 된다. 그 순종을 하면 베드로처럼 다 순교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을 보라. 그도 순종을 했지만 100세 가까이 살았음을 기억하라.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다르다.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저마다의 인생을 살면 된다. 그것으로 족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나에게 주어진 그 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방향성을 갖고 걸어가는 일,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큰 각오와 결심을 동반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그 부르심에 순종하고 그 한 스텝을 걸어간다면 우리에게 준비하신 복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이 책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강한 도전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이전에 복음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닌 메시지들이 있는가. 나누어 보라

3.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데 거부한 일이 있었는가. 왜 순종하지 못했는가. 나누어 보라

4. 구원이 내 행위에 달려 있을 때와 은혜로 받는 경우를 비교해서 내 태도의 차이가 있는가.

5.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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