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풍성한 복과 그것을 누리고 살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경험한 신앙의 세계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인 듯 생각해서 하나님의 복을 제한한다. 또한 그것을 추구하는 것만이 바른 신앙이라 생각하는 우를 범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본문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이야기와 이어서 예수님이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왜 요한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게 된 이야기를 삽입했을까. 그 요한의 의도는 무엇인가.
● 요한의 의도
그것은 참 신앙은 기적이 아닌 말씀을 통해서 온전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앞서 가나에서 예수님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였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요2:23,24) 왜냐하면 사람의 속성을 알기에 기적을 통하여 믿게 된 이들의 신앙이 온전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사마리아 여인과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믿게 된 것은 기적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42절) 요한은 기적을 통한 믿음보다 말씀을 통한 믿음이 훨씬 더 견고하고 온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가나의 두 번째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표적’이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기 전에 제자들에게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전에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눅4:29) 그런데 막상 갈릴리에 가니 뜻밖에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크게 환영을 한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45절)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단지 예수님의 기적 때문이었다. 그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적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그를 환영하는 것은 가짜 믿음이다. 진짜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다.
이 두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흔들림이 없다. 예수가 죽는 극단의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e.g: 니고데모, 백부장) 하지만 기적을 통하여 예수를 믿었던 갈릴리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예수를 통하여 자신이 얻게 될 유익이 없자 그 즉시 예수를 배척하고 살해하는 자로 돌변하였다. 이것이 기적을 통한 가짜 믿음의 결과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은 후에 내 인생이 돌밭 길에서 비단 길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짜 믿음이란 내 인생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가 내 인생을 붙들고 있으며 나의 형편과 상황에 맞는 가장 최선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자신의 인생길을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걸어가는 자이다.
왜 기적(초자연적 능력)을 추구하는 신앙이 위험한가. 그것은 그 기적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마술사들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e.g: 모세 앞의 마술사, 거짓 그리스도들, 거짓 선지자들...) 그래서 기적을 보고 쫓아다니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결코 진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린 것 역시 기적(표적)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은 요한복음에 나온 7가지의 기적을 모두 표적(sign)이라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나타내 보여주는 싸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 두 번째 표적에서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캐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두 번째 표적의 핵심이다.
● 두 번째 표적의 의미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약 22마일)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한다. 많은 경우에 이를 두고 왕의 신하의 간절함과 정성이 아들을 살리는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가버나움까지 가자고 요청한 것을 거절한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왜 거절하였는가. 만일 그것에 맞추어 가버나움까지 가서 그 아들을 고친다면 분명 왕의 신하의 신앙은 자신의 열심과 정성 그리고 간절함이 나아낸 기적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하며 말씀을 믿고 갈 것을 요구하셨다.
왕의 신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오던 길을 돌아갔고, 집에 이르기 전에 종들로부터 아들이 나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렇다. 진짜 믿음이란 예수님이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는 자이다. 말씀을 통한 순종을 통하여 내 삶이 변화되는 것을 아는 자가 참 신앙의 길로 가게 된다.
요한은 이 모든 이야기 속에 아들의 병을 위중하다고 하지 않고, ‘죽게 되었다’고 말을 하고, 예수님께 아들이 ‘죽기 전에 와야 한다’고 말한다.(47,49절) 계속해서 죽음을 얘기한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재밌다. 에수님은 ‘내가 그를 고쳤다’고 하지 않았다.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얘기한다. 그 아들의 생명을 주관했다는 뜻이다.
왜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는가. 그것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마저도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이 말씀대로 어둠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했다. 왜냐하면 그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내 삶에 기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기준하여 복을 판단하는 분들이 없어야 한다. 그것은 가짜 믿음이다. 진짜 신앙은 내 삶에 특별한 기적이 없더라도 주께서 내 인생의 길을 준비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 그리고 그를 내 영혼의 구주로 믿는 믿음이다. 그 때 신자는 내 인생의 가치와 복을 알게 될 것이고 주신 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확신하고 성경관이 무너진 적이 있었는가. 어떤 부분이었고 그 후 내 신앙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3. 나는 기적을 통한 믿음인가. 말씀을 통한 믿음인가.
4. 내 인생의 기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5. 내가 왕의 신하의 입장이라면 오던 길을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붙들고 간청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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