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순종’이라는 주제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 본문은 교훈은 주로 이러하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하나님이 이에 대한 보상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셨다. 그가 받은 복은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후에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를 때인 12장에서 이미 그에게 한 약속이기 때문이다.(창12:2, 15:5)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불렀을 때부터 이 때까지(22장) 한 번도 그에게 믿음의 수준을 복의 조건으로 걸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네 아들을 바치면 내가 복을 주겠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냥 늘 일방적으로 ‘네 자손을 번성케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 동일한 약속을 다시 한 번 본 장에서 확인한 것 뿐이다.
그렇기에 이 본문은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인한 보상이 핵심 교훈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내를 팔아 버릴 정도의 수준의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을 이렇게 믿음의 조상으로 불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 만들었다는 것에 훨씬 큰 강조가 있다.
또한 이것으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수준은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신앙
이삭을 바칠 때의 아브라함의 상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순종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님이 보상을 약속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이다. 다른 종교는 내가 신 앞에 희생과 헌신을 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보상이 더 나은 것으로 주어진다는 명백한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을 바치라는 얘기만 하지 보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게끔 두지 않았다.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직접 준비한 숫양을 바치게 했다. 이것이 다른 신과의 차이이다.
이 이삭이 번제단에 제물로 바쳐지는 장면은, 후에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희생 제물로 돌아가시는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다. 제단에 묶인 이삭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이삭 대신 숫양이 죽었듯이 나대신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을 보여 준다.
이 예수님의 단번에(!) 드린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 죄는 사함을 받았고,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어졌다.(히10:10~14)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성경은 제사에 더 이상 제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는 매주 예배 때에 헌금을 드리고 있다. 그럼 이제 헌금을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안 드려도 되는가.
먼저, 헌금의 개념을 정리해 본다.
헌금은 구약의 제물이 아니다. 만일 헌금을 드리며 제단에 재물을 드리는 것과 동일한 개념으로 드렸다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백지화 하는 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대신 단번에 희생 제물이 되었음을 못 믿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히10:12)
그렇다면 현재 왜 우리는 헌금을 하는가. 이 헌금의 개념을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헌금의 헬라어 단어들을 통하여 정리해 본다.
1) 구제금: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의 성도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경제가 어려워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했다.(롬15:26) 이것은 구제금을 의미한다. 이 때 쓰인 ‘연보’의 헬라어는 ‘코이노니아’이다. 교제, 사귐, 참여를 의미한다.(행2:42)
2) 봉사: 이 예루살렘에 보내는 연보의 또 다른 헬라어는 ‘디아코니아’이다. ‘봉사’라는 뜻이다.(고후8:20) 교회의 외부와 내부적으로 그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됨을 의미한다.
3) 은혜 혹은 특권: 은혜 혹은 특권으로 번역된 ‘카리스’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 은혜에 반응하는 특권을 의미한다.(고후8:4)
이러한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헌금'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헌금이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들이 섬겨야 할 대상을 찾고, 그 일에 참여하여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특권"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의미이고, 이 '이삭의 제물'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바뀐 제물의 의미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여기까지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단에 바친 사건을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인 것을 믿는 신앙이라 하였다.(롬4:17) 이는 아브라함이 부활 신앙을 가졌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이다.
●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아브라함은 사라가 분명히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죽은 것 같은 때에 자식을 주셨기에 이 복이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확인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은 모든 복의 원인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약의 개념으로 말하면 구원의 복은 내게서 나오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 믿음, 진심을 근거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나를 끌고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이 신앙을 가진 자로까지 이끌고 오셨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번제단 사건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3.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을 들었을 때에 내가 갖게 되는 생각은 어떤 것들이었나
4. 평소에 헌금을 드리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누어 보라.
5. 만일 하나님이 내 헌신을 근거로 사랑을 하신다면 나는 어떤 대우를 받을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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