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이 사람들보다’가 무슨 의미인가. 무엇을 비교하고 있는 것인가.
● ‘이 사람들보다’의 의미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이 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결코 그러지 않겠다’(마26:33)는 말에 대한 추궁일 것이다.
다른 해석이 있다. 그것은 베드로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네가 더 사랑하는 것이 나야? 아니면 이 사람들이야’를 묻는 것이다. 특별히 ‘이 사람들’이 아니라 ‘이것들’이라고 번역을 하면, 그가 갖고 있는 물고기, 그물, 배 등 세상적인 재산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해석이든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진심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내가 너를 용서할터이니, 이제부터 나를 사랑하겠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네 마음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까지 나에게 한 그 사랑의 고백이 참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의 수준을 묻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가페(무조건적인 사랑)하느냐’고 물었고,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친구의 사랑)한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사랑의 수준을 점검하고 그로 하여금 이제 열심을 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에 예수님이 베드로와 나눈 언어는 헬라어가 아니었다. 아람어였다. 아람어에는 사랑의 구분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 사랑은 그저 ‘아하브’라는 단어 하나이다.
그럼, 요한이 일부로 헬라어를 사용할 때에 의미있게 구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이 사랑의 의미를 그렇게 정확히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다양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때에 아가페와 필레오 둘 다 사용했고,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역시 이 두 가지를 다 혼용해서 사용했다(e.g: 3:35, 5:20, 8:42, 16:27) 요한이 자신의 책 전반에 걸쳐서 혼용을 했는데, 갑자기 21장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는 다른 의미를 두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사랑의 수준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진심이다. 베드로가 지난 3년간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진심이었느냐가 중요하다. 예수님을 그것을 묻고 싶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아주 뻔뻔스럽게 대답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안다’는 것이다.(15절) 예수님과 함께한 그 시간이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모두다 다 버려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마26:33)고 말할 때에도 진짜였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은 ‘주님, 나도 내가 이렇게 비열한 놈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이 안에는 중요한 두 가지의 메시지가 있다. 하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그것을 증명해 보일 실력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력도 안 되고, 능력도 안 되는 그를 예수님이 또 찾아 오셨다는 것이다.
그 형편없는 베드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베드로.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의 큰 일을 맡기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온 이유
많은 경우에 이 본문을 이렇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은 ‘이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다시는 이런 실패를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배려로 여긴다. 그래서 그 은혜에 보답하여 반드시 이 실패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교훈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 메시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후의 베드로는 계속 실패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실수가 있다. 그것은 베드로가 이방인을 전도하던 중 율법주의 유대인들이 오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들을 놔두고 도망간 사건이다. 이것은 이전에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간 그 사건하고 똑같은 경우이다.
이 일로 바울은 베드로를 엄하게 질책한다. 평소에 이방인에게 율법이 아닌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가르쳐 놓고는, 때마침 율법을 주장하는 자가 오면 토론을 벌이며 맞서야지 도망간 것에 대한 질타이다.(갈2:14)
무슨 말인가. 베드로는 예수님이 다시 만나서 용서하고 회복했어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예수님도 이미 이것을 아셨다. 그런데 왜 다시 이 사역을 맡기는 것인가. 그것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그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간 이유는, 실패해도 좋다는 것이다.
네가 가진 약점이 주의 일을 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모습 그대로, 그저 네가 나를 사랑하는 그 진심, 그것 하나면 족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번에 또 기회를 주면서 실패하면 이젠 더 기회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부족함, 연약함, 무지함, 고집스러움, 자책감과 자멸감. 이런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 한 가지를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진심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베드로에게 세 번을 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진심입니다.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럼 됐다.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만일 예수님이 나에게 ‘아가페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3. 내가 베드로가 ‘진심이다’라고 한 대답을 곁에서 봤다면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은가.
4. 자신이 베드로를 닮은 부분이 있는가. 어떤 부분이라 생각되는가.
5. 내가 주의 일을 하고자 할 때에 주저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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