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에게 했던 이야기와 거의 똑같다. 이삭이 흉년으로 인하여 그랄 땅으로 간 것(1절), 하나님이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한 것(창12:1,26:2), 아내를 누이라 한 일이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한 직후에 벌어진 것도(창12:2,26:3) 거의 모든 면에서 상당히 닮아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삭도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과 똑같이 이런 일을 벌일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삭이 그랄 땅으로 가는 것을 막지 않으셨는가.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 아래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브라함과 이삭 모두 자기 아내를 외인에게 넘겨주는 악행을 행하였는데 하나님이 이들을 벌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음을 그에게 경험하게 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다.
●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
이삭은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 못 된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외아들이다. 즉, 부잣집 외동아들이다. 태어나보니 금수저에 몸종들도 수두룩했다. 얼마나 귀하게 컸겠는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본인이 결혼을 하는데 그 모든 과정에 이삭이 관여하지 않는다. 40살 먹은 아들을 140살 먹은 아버지와 늙은 종이 결정한다.
특별히 이삭이 결혼하기 3년 전에 어머니 사라가 죽는다. 그 뒤로 그는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힘들어하며 지냈다.(창24:67) 그것을 본 아버지가 그의 외로움을 달래 주기 위하여 결혼을 시킨 것이다. 이게 이삭이다. 평생 자신이 나서서 특별히 뭘 한 적도 없고, 그의 인생 속에서 아버지가 하라면 시키는 대로 다 했던 순종적인 사람이다. 그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필요가 다 채워졌다. 그러니까 그의 삶 자체가 그다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못 느끼는 삶이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이 이삭을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랄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그곳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이고 스스로의 목숨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그가 스스로 결정해서 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인도했던 그 동일한 방법으로 이삭을 만지셨고, 이 때 비로소 그는 개인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이전에 그가 겪은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이 기적의 하나님이라는 것도 수 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내 아버지 아브라함을 위하여 행하신 일이었다. 이삭은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개인적인 체험과 감동이 없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이후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이 못나고 부족한 자신을 혼자 두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게 된다. 자신을 사랑했던 아버지도 떠나고, 도저히 잊지 못할 어머니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내 곁에 계시고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는 조금씩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간다. 이것이 그랄 땅에서 기대한 하나님의 의도였다. 그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복을 경험한다.
● 하나님의 복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 속이며 외인에게 넘겨 준 것은 큰 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건 직후에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12절) 이삭이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의 수확을 거두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이 구절을 한국말 번역으로 보면 마치 이삭이 열심히 땅갈고, 씨를 뿌리고, 물과 거름을 줘서(농사해서) 백배의 결실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원어를 보면, 그가 농사하지 않았다. 단지 씨를 뿌렸을 뿐이다.(히.자라) 그런데 백배의 결실을 얻었다. 그 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음을 의미한다.(12절)
우리가 가진 안 좋은 습관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 복을 받았다고 하면 그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는다. 그런데 이삭을 복을 받았는데, 아무리 봐도 이삭은 잘한 것이 없다. 그럼,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이것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내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라는 구절이다.(5절)
그러나 이 말은 아버지가 잘했기 때문에 아들 이삭이 아무 것도 안 해도 복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당시에는 계명이 없었다. 율법이 없는 시대였다. 율법은 이 때를 기준으로 약 500년 후에 모세 때에 세워진 법이다. 사실 ‘아브라함이 계명을 잘 지켰다’는 이 말은 창세기 저자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하여 한 말이다.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삶은 그다지 순종적이지 않았다. 믿음이 없는 자를 하나님이 설득하고 어렵게 끌고 와서 ‘믿음의 조상’을 만들었다. 그가 잘 한 순종은 단 하나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들 이삭을 번제단’에 바친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가 순종해서 복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가 아들을 바친 사건, 그 아들을 바칠 때에 하나님이 준비한 숫양으로 대신 제사한 사건을 의미한다. 즉, 그의 순종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원인이 되어 복을 받았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평생 잘한 것이 없는데 그 순종으로 복을 받았다. 본문의 이삭도 마찬가지다. 그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다. 오히려 큰 죄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선언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거기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 분의 희생과 그 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일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이삭처럼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입장에 있다면 그랄 왕에게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3. 가계에 흐르는 저주 혹은 축복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출20:6을 읽고 생각을 나누어 보라.
4. 북 이스라엘 왕들은 모두가 우상 숭배를 떠나지 못했다. 그것과 천대에 흐르는 복의 상관관계는?
5. 평소에 내가 낸 열심 보다 결과가 더 좋을 때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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