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세 번째 표적을 일으키신 곳은 베데스다 연못이다. 이곳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셨다. 이것이 복음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 본다.
● 베데스다 연못의 의미
베데스다는 히브리어로 ‘베이트(집)’과 ‘헤세드(은혜)’가 합쳐진 말이다. 즉, 은혜의 집이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예루살렘의 성문 중 양문(sheep gate) 곁에 있었다. 양문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양이 들어오던 문이었고, 이 문을 통과한 양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씻은 후(정결 예식)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졌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요10:7) 예수를 상징하는 양의 문과 정결케 되는 못.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이곳 베데스다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는 은혜가 넘치는 곳임을 의미한다.
이 은혜가 충만한 곳에 가장 비참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병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마른 사람(중풍병자)이다. 이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여기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제일 처음에 들어간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에 먼저 들어가기를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 그것은 천사가 물을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 못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맹인’은 물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리 저는 사람’은 피부병에 걸린 사람과 함께 달리면 이길 수 없다. ‘혈기 마른자’는 뛰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힘으로 한 발자국도 걷기 힘들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고침을 받을 수 있는데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7절) 은혜로운 날에, 은혜로운 장소에,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데 그곳에 은혜가 없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문제이다.
지금 이 모습은, 이 베데스다라는 장소 자체가 인간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극명한 대조를 통해서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이다. 이것은 인간이 처한 현 주소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치료가 필요하다. 그들은 이를 위하여 스스로 연못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 행위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자신의 능력으로 전혀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이 병자에게 우리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병자의 행위가 아닌 말씀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그를 치료하셨다. 이 표적이 바로 복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 그것이 복음이다.
● 38년 된 병자의 의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다. 이 시기를 두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시내산을 기준으로 그 전 2년, 그리고 그 후의 38년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까지 불과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제 사흘 길을 가면 가나안 땅이다.
이곳에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정탐꾼 12명을 파송한다. 그들이 정탐을 하고 돌아왔는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하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곳 사람들에 의하여 다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원망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38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된다.(신2:14)
이 38년된 병자의 모습이 영락없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 어떤 부분이 비슷한가. 그것은 하나님이 펼쳐 놓은 은혜가 코 앞에 있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 그것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같다. 또한 이 38년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의 햇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이를 통하여 신자의 바른 삶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정신이다. 그런데 그 정신은 오간데 없고,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기계적인 행위만이 남았다. 즉, 나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이 있다고 믿고 있는 상태. 이것이 곧 이 38년 된 병자로 투영된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행위를 기준으로 복과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은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것은 신자에게 바른 삶을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 방법이지, 그것이 구원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내가 무언가를 행한 것을 근거로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은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 사건 후에 한 이야기를 첨가했다. 그것은 고침을 받은 병자에게 유대인들이 너를 고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그 때 그 병자의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이 병자가 고침을 받은 이유는 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간절함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겠다는 약속 때문도 아니다. 심지어 그가 회개했다는 기록도 없다.
정답은 그에게서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전적으로 부족한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내가 지금 누리는 모든 복은 내가 원인이 되고 근거가 되지 않는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은 이 일을 안식일에 행하셨다. 왜 그랬는가.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목숨 걸고 계명을 지키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철저하게 목숨을 다하여 지키는 계명이 결국에는 예수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결국에는 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 율법과 생명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면. 그것이 바로 안식일에 베데스다에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신자란,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이고, 왜 나에게 부어주시는 지 이유를 모르는 것이 마땅한 것이고, 그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복음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가 무언가 구할 의지조차 없이 주저앉아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나누어 보라.
3. 신자라면 말씀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이 설교를 들을 후 말씀을 지키는 것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 것이 있는가.
4. 베데스다에는 38년 된 병자 말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왜 예수님은 그 사람만 치료하셨다고 생각하는가.
5. 누군가를 판단하는 마음이 들 때에 내가 가져야 하는 자세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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