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은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13절) 사실 원어로 보면 그가 부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아주 큰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이란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는가. 그것은 ‘절망’이다.
● 하나님의 방법: 절망
이삭이 많은 부를 쌓게 되자 그 땅의 원주민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를 했다. 그래서 그의 우물을 덮어 버렸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우물을 덮었다는 것은 생명줄을 끊어 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 지역을 떠나라 명했다.
이삭은 연약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 옮겨간 곳에서 우물을 판다. 그런데 물이 나온다. 너무 기쁜 일이다. 그 기쁨도 잠깐 그 다음 날 보니 블레셋 사람들이 또 우물을 덮어 버렸다.
이삭은 또 이주한다. 그리고 우물을 판다. 또 물이 솟구친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또 우물을 덮는다. 그럼 또 옮겨 간다. 이렇게 이주하고, 우물을 파서 물을 얻고,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덮으면 또 옮기고. 이 일을 여섯 번을 행한다. 신비로운 것은 우물을 팔 때마다 물이 터진다.
이 일이 반복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왜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이삭에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우물을 하나 얻기도 쉽지 않은데 이삭은 가는 곳 마다 우물에 물이 터진다. 이 일로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보호하고 계신 하나님을 본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비멜렉 왕이 군대장관과 함께 이삭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어 평화롭게 지내기를 제안한다.(28절) 이삭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냥 살려고 발버둥 쳤을 뿐이다. 그런데 그 절망의 상황이 한 나라의 왕이 두려워할 만한 인물로 변해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셨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삭은 6번을 옮겨갔다. 그렇게 이주하여 도달한 곳이 어디인가. ‘브엘세바’이다.(23절) 브엘세바가 어떤 땅인가. 그 땅은 하나님이 오래 전에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 자신에게 약속했던 바로 그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이다.(창17:8)
이삭은 한번도 ‘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다’는 목표와 의지를 갖고 살지 않았다. 그냥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싸우기 싫어서 옮겨 다녔을 뿐이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하나님이 약속한 그 땅 한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것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신 우리의 인생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이다. 그럼, ‘함께 하심’이란 어떤 의미이며, 그것을 통하여 누리는 복은 무엇인가.
● 함께 하심의 복
신자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신학용어가 있다. 그것은 ‘성화’이다. 성화라는 단어는 오해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주는 의미가 ‘어떤 태도나 행동의 변화 혹은 진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화라는 말에는 변화와 진전의 뜻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 성화는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단지, 구원 받는 자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결과이다.
성화는 내 노력에 의한 변화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다.(개혁주의 성화관) 이 연합이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연합)을 통하여 이전의 나는 죽고 없어지고, 새생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롬6:4)
성화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이 경험을 통하여 신자의 신분과 지위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부활이 그러하다. 내가 노력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연합한 자에게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결과가 부활이다.(롬6:5)
결국에는 성화란, 내가 점진적으로 노력해서 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순간, 법정 의인으로 선언 받고, 그 변화된 지위와 신분을 내 삶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그 인식하는 자에게서 파생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변화이다.
이삭이 그러하다. 이삭은 그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이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깨닫게 되니, 그가 위대한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는가. 그것은 그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다.
● 이삭의 죽음
그는 180세에 평화롭게 눈을 감은 것으로 성경은 기록한다.(창35:29) 그래서 그를 순종한 자가 누리는 축복의 대표적 인물로 생각한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그는 재물이 많았지만 그의 말년이 그다지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할 때에 이미 아주 건강이 안 좋았다. 눈도 보이지 않고, 곧 죽을 것 같았다.(창27:1,2) 학자들은 그 때의 그의 나이가 약 137세 정도로 본다. 그렇다면 그의 남은 년 수 43년을 건강치 못하게 살았음을 의미한다.
그의 둘째 야곱이 약 77세에 집을 나가서 20여년 만에 돌아왔다. 달랑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오랜 기간 만나지도 못했고, 야곱이 돌아 왔을 때는 이미 그의 어미 리브가는 죽고 없었다.
이삭의 죽기 직전의 상황은 어떠한가. 요셉이 형들에게 애굽으로 팔려갔을 때의 나이가 17세이다. 그럼 이삭이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168세) 여전히 그의 인생에 풍파가 멎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이삭의 말년이 부러운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했던 이삭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화이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지는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의 변화로 거룩이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모든 역경을 통하여 이 땅이 가진 한계를 알고, 미련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 이것이 성화이다.
이삭은 이러한 역경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졌고, 결국에는 그것이 그를 큰 사람,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13절) 이것이 신자에게 약속된 우리 인생의 길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이삭은 재물이 많았다. 그럼에도 풍파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3. 평소에 성화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 설교와 가장 크게 다른점은 무엇인가
4.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는가.
5. 나는 말년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기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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