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곳곳에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우리를 신부로 묘사하여 우리의 구원을 예수님과의 혼인으로 표현한 곳이 아주 많다.(마15:1,계19:9,고후11:2) 그런 의미로, 지금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은 신랑된 예수님과 신부된 교회와의 관계를 그림자로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왜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에게 본인의 고향인 ‘하란’에서 아들 이삭의 아내(며느리)를 구하라고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이다.
● 약속의 성취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을 한다. 이 둘 사이에서 야곱이 태어난다. 이 야곱은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의 딸 레아와 결혼한다. 이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야곱의 열 두 지파가 나온다. 그 열 둘 중에 유다가 있고, 후에 유다에게서 다윗이 나오고, 다윗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
이런 계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삭의 배우자를 아브라함의 고향과 친족에서 골라야 할 이유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이다. 이것은 마치 사명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내용은 우리의 구원과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리브가를 그곳 하란에서 건져낸 것은 그녀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다. 우상이 가득한 곳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신앙의 상태와 상관이 없다. 이전에 믿음이 없던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건져내셨던 것과 동일한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이루어진 일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역사와 사건, 인간의 삶과 운명을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고 다스린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 신앙'이란, 내가 이해가 되던, 되지 않던 내 기대와 소원과는 다른 일이 내 눈 앞에 펼쳐지더라도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침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평강을 느끼고, 성경을 읽을 때에 명확히 오늘 해야 할 일을 알게 해 주시고, 찬양할 때에 마음의 평강을 얻는 것은 ‘좋은 신앙’이다. 하지만 ‘최고의 신앙’은 아니다.
이렇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꼭 기독교가 아니어도 된다. 명상이나 요가로도 가능하다. 기독교 최고의 신앙은 내 마음의 평강으로 신앙을 저울질 하지 않는다. 내 인생의 어려움 속에 승리를 믿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비통한 마음이 들고, 하늘을 향하여 삿대질하고 싶을 지라도, 하나님이 이 일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의 아브라함을 통하여 명확히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현재 신앙의 상태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절정인 상태, 최고 수준의 신앙인이다. 그는 자신의 종에게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며느리를 구할 것’을 명한다. 그는 그곳에 가면 반드시 아들의 좋은 배우자가 있을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가서 이 일을 준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7절)
그런데 아브라함의 명을 받은 종이 한 가지 질문을 한다. 그것은 ‘만일 그녀가 가나안 땅에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것이다.(5절) 그 질문에 아브라함이 뜻밖의 대답을 한다. 그것은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한다는 것이다.(8절) 마치 이 대답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여전히 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의 신앙은 아들 이삭을 바칠 정도로 최고 절정이었다.
그럼 이 대답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이 성숙한 신앙이다. 성숙한 신앙은 자기의 뜻, 생각, 응답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내 소망과 소원이 있고,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믿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굳이 내 것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다. 그럼, 나의 확신과 하나님의 뜻은 얼마나 다른가.
● 나의 확신 vs. 하나님의 뜻
엘리사는 당대 최고의 예언자이다. 그런데, 그의 예언도 맞지 않을 때가 있다. 모압과의 전쟁이 그러하다. 분명히 엘리사는 대승을 거둘 듯이 예언했다. 그러나 결과는 승리라고 말하기 애매하게 끝이 났다.(왕하 3장)
그럼 하나님이 능력이 없다는 뜻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엘리사의 예언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최고의 신앙이 이러하다. 그것은 내가 가진 신앙으로, 그 믿음으로 내가 승리하고, 만족하고, 좋은 것을 차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간절히 빌고 원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이해하는 것. 이 땅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이 최고의 수준에 오른 사람이 보이는 태도이다.
아브라함은 이 일 이후에 더 이상 에피소드로 등장하지 않는다. 최고의 신앙이 오른 후에는 간단히 그의 몇 가지 주변 사실을 소개하고 이 땅을 떠난다. 무엇을 말하는가. 최고의 신앙에 오른다는 것이 내가 무엇을 소유했는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로 내 자존감과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내 인생 전체는 그저 하나님의 꾸준히 인도하고, 지도하고, 이끄는 삶이었음을 자랑할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최고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기독교 신앙을 가진 배우자를 얻는 것의 유익한 점을 나누어 보라.
3.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주변에 최고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가. 어떤 점이 그렇게 느꼈는가.
4. 내 소원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 눈은 어떻게 생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5. 엘리사도 예언이 틀릴 수 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 예언자들을 어디까지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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