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다.(12절)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예수님이 어둠 속에 있는 내 인생에 빛을 비추시면 우리가 진리를 찾아 갈 수 있다’로 이해한다. 맞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이 말하고자하는 얘기의 피상적인 부분이다.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다.
● 빛과 어둠의 의미
요한은 이 책을 시작하며 계속적으로 한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것이다.(1:5)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너희가 알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14,19,27,43,55절)
앞서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 빛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 때 어둠에 있던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깨달았는가. 아니다. 오히려 빛을 꺼 버렸다. 빛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렸다. 빛이 왔는데 못 알아본다. 이것이 핵심이다.
왜 못 알아보는가. 그것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이 맹인일 때에 못 알아본다. 그렇기에 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이 빛이고 우리가 어둠에 있었다’는 뜻은 단순히 그 분을 만나서 우리가 인생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빛을 비춰도 못 알아보는 맹인과 같은 존재였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무리 빛을 비추어도 우리 스스로 결코 진리를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이 죄인 된 자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빛을 통하여 내가 스스로 온전한 길을 걸어 내가 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내가 변해서 내가 답이 되려고 한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을 인도하려고 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도무지 안 되기에 하나님이 방법을 바꿨다. 그것은 옆에 서서 훈계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사 그가 우리 대신 우리가 할 일과 우리가 이뤄야 할 일을 대신 이루게 하셨다. 내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그 일을 이루신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근사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고,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내 안에 들어오셔서 직접 우리의 인생을 끌고 가는 것이다. 맹인이 눈을 떠서 진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빛인지, 어둠인지를 모르기에 그가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바꾼 사건.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왔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다.(7절) 여기서 우리의 실수는 ‘너희’를 그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말한 ‘너희’는 바로 나이다. ‘나는 옳고, 간음한 저 여인은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다. 그것을 깨닫는 자가 신자이다. 신앙이 좋아진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이전 보다 더 근사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누구에게도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인물 중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말하라고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울이다. 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후에 자기인식을 보면 신앙이 깊어지는 것의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는 막 믿고 난 후에는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지를 자랑했다.(갈1:13,14) 그 후 믿음이 생긴 후에는 스스로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사도 중에 작은 자,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라했다.(고전15:8,9)
시간이 더 흐른 후에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자’(엡3:8)라 하더니 급기야 그가 이 땅을 떠나기 전 유언처럼 쓴 디모데전서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딤전1:15)라 했다. 이것이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다. 신앙의 성숙은 내가 이전보다 선한 일을 하고, 희생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가장 처음에 일어난다. 신앙의 가장 깊은 단계는 나는 누구도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아는 것이다.
왜 요한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이토록 처절하게 고발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죄 밖에 지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바로, 내 인생을 구원할 해답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결심하고, 노력하고, 몸부림쳐도 나는 선을 만들어 내지 못할 뿐 만 아니라, 악을 거부하지도, 대항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아는 자가 신앙인이다. 그래서 요한은 계속해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다. 이 반복을 통하여 우리를 항복하게 하고 ‘주여 도와 주옵소서’라는 비명을 쏟아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 신자의 삶
신자의 정체성은 ‘의인으로 불림 받는 죄인’이다. 나는 여전히 죄를 생산해 내는 명백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의인으로 불러 주는 것뿐이다.(마5:14)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가 어둠에 거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이제 더 이상 내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소속이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32절)는 말이다. 더 이상 어둠의 세력이 나를 묶어 두지 못한다. 그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나의 싸움은 타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한 나와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다. 그렇기에 나를 빚어가는 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진리 안에 자유를 허락하시는 신자의 인생을 알게 될 것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죄된 나의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때는 언제였는가.
3. 내가 생각하는 신앙의 성숙과 오늘의 말씀을 통한 성숙의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4. 내가 타인을 향하여 질책과 정죄를 하는 부분은 상대의 어떤 부분에 주로 반응하는가.
5.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의 의미를 내가 이해한 것으로 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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