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야곱을 찾아오는가. 오셔서 야곱에게 무엇을 약속하는가.
● 언제 찾아오시는가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인 일로 야곱은 그가 살던 가나안 땅 브엘세바를 떠나 이방 땅 하란으로 도망을 간다. 그곳은 외삼촌 라반이 있는 곳이다. 지친 야곱은 벧엘에서 밤을 맞이하고 그곳에서 잠을 청한다. 그 때 야곱은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꿈에 보니까 사다리가 하늘로 시작해서 자신이 누운 곳까지 닿아있는데,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하나님이 그 위에 계셨다. 하나님이 이 사다리를 통하여 야곱을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새벽 제단, 금식 등 내 노력과 수고를 들이는 진심어린 예식을 통하여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곱을 보라. 그런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찾아 오셨다. 그것은 그가 죄를 짓고 도망가는 순간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죄인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그 동안의 잘못에 대한 호된 질책이 없다. 오히려 야곱의 조상들에게 했던 그 복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독교이 복음과 구원은 내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이유요, 원인임을 보여준다. 꿈에서 찾아온 하나님이 야곱에게 5가지의 복을 약속한다. “1) 땅 2) 복의 근원 3) 보호 4)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함 5) 떠나지 않음”이다. 이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약속이 있다. 그것은 네 번째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이다.(15절)
여기서 ‘이 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복의 땅, 즉 가나안 땅이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본인의 의지와 바람과 상관없이 그 곳을 떠나고 있다. 그의 실수가 인생의 실패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으로 하여금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이유로, 결코 우리를 포기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의 부족함과 못남과 상관없이 당신의 성실함으로 우리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주시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의 회복을 의미한다.
● 약속을 이루는 방법
본문에는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상징하는 모형이 등장한다. 그것은 야곱의 꿈에 나온 사다리이다. 이 그림은 이 사다리가 하늘과 땅의 연결통로가 되어 하나님이 계신 곳과 인간의 땅이 맞닿아 소통하는 내용이다. 즉, 이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이 소통하게 됨을 잘 보여주는 모형이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나다나엘과 대화 중에 그대로 인용하셨다.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51) 창세기의 내용과 똑같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보여준 그 꿈의 내용의 성취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가 하늘과 소통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대속의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이 연결되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그림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루실 그 약속의 성취 방법은 야곱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보낸 사다리. 그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찢어 하늘을 여셔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실 약속의 성취 방법이다.
● 야곱의 반응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자 야곱이 두 가지 서원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과 그 섬기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럼, 십일조와 하나님의 복에 대하여 정리해 본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일조를 요구하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이에 대한 답은 “예스”이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십일조를 요구하신다. 그런데 십일조 뿐만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계명들은 신자가 가야할 인생의 방향과 수준이다. 그렇기에 모든 계명을 지켜 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그 여러 계명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웃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기에 마땅하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십일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십일조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비롯한 빛과 소금의 삶, 원수사랑, 기도와 구제 등 산상수훈의 모든 내용을 신자의 마땅한 삶의 자세와 방향으로 초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길로 이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계명은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유독 십일조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반응을 한다. 왜냐하면, 재물은 하나님과 대적할 정도로 누가 주인인가의 대표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둘 중에 한 주인을 섬기라고 대조하며 설교하셨다.(마6:24)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자보다 이 땅의 복(재물,건강)을 더 받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노”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복음은 내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잘하면 복을 내려 주시는 조건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의 인생을 항복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내가 가진 재물을 증가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부족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야곱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서원했다. 그런데 그 때 드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한 약속을 지키면 앞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지극히 야곱답다. 하나님 앞에서 협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야곱의 전생애에 그의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지켰다는 이 후의 성경 기록은 없다.
물론, 그의 말년의 신앙의 모습을 보면 분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에는 기록이 없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그가 십일조를 했느냐 안 했느냐를 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약삭빠른 야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자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결단, 결심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분에게 항복하게 하는 이유이다.
●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일 때에 나를 찾아오신 기억이 있는가. 그 때 무엇을 느꼈는가.
3.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린 서원이 있는가. 어떤 상황이었고, 그 후로 나는 어떻게 하였는가.
4. 설교를 듣기 전과 후에 십일조와 헌금에 대한 개념이 바뀐 것이 있는가.
5. 주님 주신 계명 중에 나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e.g:용서, 구제,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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