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벽 봉헌식을 갖는 장면이다. 오늘 이 자리가 있기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느헤미야이다. 일반적으로는 봉헌식을 할 때에는 가장 헌신하고 수고한 사람에게 ‘공로패’를 수여하여 사람들 앞에서 그의 공을 드러내고 감사를 표한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 봉헌식의 자리에서 모든 공을 백성들에게 돌린다. 이 봉헌식에 드러나는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첫 번째로, 느헤미야가 공을 돌린 첫 번째 그룹은 누구인가?
1. 눈에 보이지 않는 수고자들
느헤미야는 12장 1~26절까지 길게 성벽 재건에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1~11절까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 시절에 스룹바벨과 함께 본국으로 귀환한 사람들이다(1절). 즉, 약 93년 전에 온 사람들이다. 지금 현재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잊혀진 사람들이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 척박한 땅에 와서 모든 고생을 하며 그 땅을 지켜낸 사람들이다.
느헤미야는 봉헌식 때에 자신이 받아야 할 그 영광의 첫 자리를 그들에게 돌린다. 왜냐하면,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그들은 아무도 살지 않은 곳에 와서 이루어 놓은 일이 없었기에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이라고 낙담하며 인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오늘의 우리는 그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첫 영광의 자리에 앉혀 놓는다.
그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진 자에게는 의미가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었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후세의 자손들에게 삶의 귀한 터전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2. 함께 수고한 백성들의 돋보임
봉헌식이란 하나님께 성벽과 성물을 감사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엄숙하고나, 진지한 분위기가 아니라 엄청 떠들썩하고 요란하게 진행을 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면 성전 혹은, 성안의 넓은 광장에서 해도 되는데 왜 굳이 성벽 위로 올라가서 큰 소리로 진행을 했을까?
그에 대한 답은 4장에 도비야가 했던 말에서 찾을 수가 있다. 그는 성벽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다(4:3)’라고 비웃었던 적이 있었다. 느헤미야는 그 말을 기억했다. 그리고는 모든 공사가 완공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위로 올려서 뛰어 찬양케 했다. 그것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 일을 이루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 것이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 또 하나의 독특한 점을 볼 수 있다. 이 봉헌식은 에스라가 인도하는 팀과 느헤미야가 인도하는 팀, 이렇게 두 팀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악기를 동원하여 큰 소리로 찬양하며 성벽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아 마지막에 성전에서 만나는 행진을 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에스라는 그들의 앞장 서서 인도한 반면에 느헤미야는 그들의 뒤에 서서 그들의 뒤를 좇아갔다.
무슨 의미인가? 느헤미야는 자신을 믿고 따라준 그들이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보여 준 것이다. 실제로 흙은 캐고, 돌을 나르고, 성벽을 지어 올린 사람은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며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이렇게 멋진 일을 이루어내셨습니다. 이들을 축복하소서”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앞에 봉헌하고 있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이들을 앞세워 찬양함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이루어낸다. 첫째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두 번째로는, 이들로 하여금 앞에서 찬양하게 함으로, 이 어려운 일을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들을 통하여 이루어냈다는 만족과 보람과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3. 정결 의식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봉헌식을 거행하기 전에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 정결식은 지도자들, 백성들 그리고 성문과 성벽에 행해졌는데 정말 쉽지 않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식에 앞서서 반드시 이 의식을 행해야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가 있는 자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의 죄가 깨끗하게 씼음 받지 못한 채로 하나님 앞에 가면 죽음까지 이르기도 할 정도로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현재의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오면서 정결한 모습으로 나오지 않으면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한 주를 살면서 세상에서 할 짓, 안 할 짓 다하고 거짓과 분노와 미움으로 살다가 이곳에 나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여기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큰 딜레마이다. 하나님은 죄 있는 자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 앞에 놓여진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럼, 우리는 망한 것인가? 성경이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망했다. 방법이 없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으로 하나님 앞에 갈 방법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기에 우리에게 예수의 피가 필요하다. 왜 내가 예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하는 것인가? 왜 내가 예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야 하는가?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가 정결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나오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 하나,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 마음 하나면, 하나님께서 보혈의 피로 우리를 덮으사 우리를 정결한 자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을 다한 자들을 끝까지 찾아내어 그들의 인생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또한 현실과 싸우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사는 자들을 앞세우며 자신이 받아야 할 마땅한 공을 그들에게 돌리며 그들을 응원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정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세운다. 이 모든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인가?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느헤미야는 예수님의 그림자의 모습으로, 앞으로 이어지는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행할 모습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느헤미야 봉헌식 이야기의 핵심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누군가 나의 공을 알아주지 않을 때의 기분은 어떠한가? 구체적인 사례를 나누어 보라
3. 내 공을 스스로 남에게 돌린 경험이 있는가? 그것으로 인한 결과는? (좋았던 것 & 나빴던 것)
4. 내 자녀들이 나를 돌아보며 나의 삶의 어떤 부분을 인생의 타인을 위한 공으로 이야기할 것 같은가?
5. 하나님이 내게 하신 일을 가장 크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6. 내가 고백할 수 있는, 이번 주 중에 나를 괴롭힌 죄가 있다면 나누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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