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성벽이 지어져 간다. 그런데 이방인 산발랏,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및 아스돗 사람들이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포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꼼짝 달싹 못하게 한다. 이들이 이렇게 죽기 살기로 방해하는 이유는 기득권 때문이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사마리아와 암몬 지방의 총독으로 정치적, 경제적인 입지를 굳히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성벽이 지어지면 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면 성경이 정말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놓치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방해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기득권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 때문이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민족의 뿌리가 되는 모압과 암몬은 성경 전체에서 항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이 되는 민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이토록 방해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서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사탄의 방해 공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와 개인의 굳건한 성벽들을 파괴하기 위하여 공격해 오는 세력이 있을 때에 우리가 눈에 불을 켜고 조심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또 다른 영적인 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울 왕이 다윗을 창으로 죽이고자 했던 이유도(삼상18장), 예수님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갈 때에 광풍을 만난 것도(마8장) 성경은 그 배경에 영적으로 우리를 묶어 놓고자 하는 악한 세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남편이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고, 아내가 필요 이상의 돈을 소비하고, 아이가 인생을 낭비하는 일의 배경에는 누군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탄의 공격 패턴은 늘 비슷하다. 주로 ‘말을 갖고 흔들어 놓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는 공동체 외부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사역을 비웃고 조롱해서 무가치하게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 작전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연합하여 건축에 힘을 더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공격한다. 그것은 어떤 방법인가?
1. 그들의 공격 방법 : 나와 가장 가까운 자를 사용한다.
성벽 공사가 거의 절반에 이르러 가자 이제는 그들이 비웃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예루살렘을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만들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는 그 말을 퍼뜨린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형제 유다 사람들이 흔들린다. 그들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싹 터 오르고 우리가 이 일을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이 말이 유다 사람들 사이에 노래로 만들어 퍼지기 시작하더니(새번역 4장10절) 급기야 느헤미야에게 10번이나 와서 무너진 마음을 전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유다 형제들이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 말을 해서 형제들을 괴롭히거나 재건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진심으로 걱정이 되고 두려워서 하는 말이었다.
마귀는 항상 이런 방법을 쓴다. 나랑 아주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게 만든다. 원수가 이런 말을 하면 긴장을 하고, 방어를 할 텐데, 나를 위하는 사람, 나와 평생을 함께 한 사람, 결코 나를 배신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나를 흔들어 놓는다.
아담을 무너뜨린 것도 그의 아내였고, 예레미야, 욥을 공격했던 것도 아내와 친구들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의 삶을 재건하고자, 공동체를 지키고자 노력을 하면, 나를 넘어뜨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가 가장 신뢰하고, 염려하고, 나를 위하여 헌신을 했던 사람을 사용해서 우리를 넘어뜨린다.
우리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일을 만났을 때에 그것이 특별히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오는 어려움이라면, 액면 그대로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 뒤에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어떤 나를 위하는 꿀과 같은 말일지라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향과 맞는지를 판단해서 행해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그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대적 방법 : 주를 기억하라
느헤미야가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에 그들에게 한 말은 ‘주를 기억하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때 느헤미야가 사용한 ‘기억하라’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단어의 뜻과 다르다. ‘기억하라’의 원어인 ‘자카르’라는 이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의 역사 속에 담겨 있는 ‘구원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조건 없이 개입하여 구원을 이루어 낼 때’ 이 단어가 사용이 되었다. (출2장 24, 25절. 출8장 1,2절)
‘자카르’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는 시간이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다가 생각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품은 단어이다. 이 단어가 명사로 쓰여졌을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하나님이...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남자(남성)’이라고 번역된 단어이다.
최초로 탄생된 남자는 누구인가? ‘아담’이다. 아담은 구약에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롬5:14). 아담은 그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죄 지은 인간을 대표한다. 예수님은 죄지은 아담의 본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다.
즉,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스스로 구원해 낼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구원해 내시는 ‘자카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런 능도 없고, 힘도 없을 때에 우리의 힘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자카르’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에 빠져 아무런 희망이 없을 때에 느헤미야가 외친 ‘주를 기억하라’라는 말은 신약의 표현으로 말하면, ‘우리의 무력감을 아시는 우리 주 예수께서 일을 하실 것이다. 그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여 우리를 구원해 내실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무너진 성벽으로 절망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속에 직접 뛰어들어 그분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이고, 그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다.
나눔 질문
1.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나누어 보라.
2. 내 문제가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임을 깨달았던 적이 있었는가? 언제, 무슨 상황이었는가?
3. 나와 가장 가까운 누군가로 인하여 절망하고 상처가 되었던 일이 있었는가?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4. 누군가 진심으로 나를 위로했던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되었던 일이 있었는가?
5. 본인이 생각하는 위로는 어떤 방법이 제일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가?
6. ‘자카르’는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인생의 개입으로 인한 구원이다. 나의 삶 속에 이 말을 체험한 경험이 있었는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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